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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의 역사 > 유적/유물 >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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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유씨 양성이씨

열부 양성이씨 기행비
(烈婦 陽城李氏 紀行碑)

 

▶ 소재지:전남 장성
▶ 적개요(事蹟槪要)

열부 양성이씨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박준기(朴準基)의 처 이육인(李六仁)이며 23세 병국(炳國)의 따님이다. 남편의 독립운동으로 22세에 사별, 아들 석구(錫九)를 친정에서 키우며 수절한 열부로 장성 향교의 포청을 받아 이 비를 손자 경호가 세웠다.


열부 양성이씨 기행비

 
 

열부 양성이씨 정려각
(烈婦 陽城李氏 旌閭閣)

 

▶ 소재지:경북구미시(龜尾市) 거의동(居依洞) 7의 3
▶ 사적개요(事蹟槪要)

곽태호 처 열부 양성이씨지려(郭泰鎬妻烈婦陽城李氏之閭)
열녀(烈女) 양성이씨(陽城李氏)는 이석배(李碩培)의 딸이며 현풍인(玄風人) 곽태호(郭泰鎬)의 아내이다. (25세손) 이씨(李氏)는 16세 때 거의동(居依洞)의 현풍곽씨(玄風郭氏) 문중(門中)에 시집온 후 시부모와 남편을 잘 모시고 부도(婦道)를 닦던 중 남편이 중병(重病)으로 5년 간 앓게 되자 그 병이 자기와 대신할 것을 매일 같이 기도했으나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 때가 1918년 음력 9월 30일이었다.

남편을 따라 죽고자 마음을 먹었으나 시모님의 끈질긴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후에 유복녀(遺腹女)인 딸을 낳으매 아뢰기를 박명(薄命)한 소부(少婦)가 구차스러운 명을(命) 이어온 것은 후사(後嗣)를 못 이을까 두려워 지금까지 살았으나 이제는 끝났다고 하면서 며칠 동안 굶다가 남편의 빈소에서 통곡하고 뜰에서 떨어져 남편의 뒤를 따르니 그 때가 음력 10월 10일로 나이가 21세였다고 한다.

그 후 죽은 지 10년 뒤 묘소 개장시(改葬時)에 남편의 시체는 부패되어 있었으나 이씨(李氏)의 시체는 생시(生時)와 같이 묘 가운데서 자색의 기운이 어려 있는 현상이 있었다 한다. 인동유림(仁同儒林)에서는 이씨(李氏)의 열행(烈行)과 부덕(婦德)을 중앙에 품신하여 표창케 하였으며 1925년 8월에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 정려각(旌閭閣) 상량문(上樑文)은 1937년 인동인(仁同人) 장승환(張升煥)이 지었다.
※참고:대성문학원(大聖文學院)의 포창문(褒彰文)


열부 25세 양성이씨 정려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