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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양성이씨는 시조 상주국공(上柱國公) 한 할아버지의 핏줄을 탄 백대지친(百代之親)이다. 꾸준히 대동보를 수보해온 우리 족보는 동종의 혈통과 가계를 알고 질서를 통제하며, 동종의 단결과 보다 나은 삶을 구축하기 위한 값진 씨족의 보감이다.또한 우리 족보는 동종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값있는 씨족사로 그것을 오래도록 보존하는데 뜻이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해서 우리 양성이씨는 거족적인 대동보를 10수보까지 발간 해온 것이다.

  족보를 창간한 문간공 11세 승소(承召)께서는 서문 서두에 “우리나라에서 벼슬한 이는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모두 양성이씨 내외손의 후예들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우리 양성이씨는 시조 상주국공이 득성한 이후 국가의 동량(棟樑)이 된 분이 줄을 이어 번연(蕃衍)해온 명문거족이기 때문이다. 수은(睡隱) 강항(姜沆)은 초수보 서문에서 “양성이씨는 상주국공이 중국에서 공을 세우고 고려에서 높은 벼슬에 오른 후, 그 자손이 대대장상(代代將相)으로 고려조를 도왔고, 조선조에 와서도 끊이지 않고 번져 사방에 위세를 떨쳤다”라고 적고 있다. 동지중추부사공 18세 인석(寅錫)은 2수보 서문에서 “위대한 인물과 훌륭한 덕을 지닌 분들이며, 국가에 무훈을 세운 분들이 대대로 가문을 빛나게 하였기에 우리나라 팔대성(八大姓) 가운데 우리 양성이씨가 가장 훌륭하다는 세평을 얻게 되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위와 같은 기록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국가 발전에 헌신한 많은 분들이 거족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간공의 다음과 같은 글을 오늘에 되새겨야 할 것이다.
  “조상은 자손들의 종원(宗源)이며 자손된 자 잊지 못할 뿌리로 훌륭했던 조상들을 추념(追念)하고 공경한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그 조상만큼 훌륭하게 되어야겠다는 높은 이상을 품고 큼직하고 맑은 행동을 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거의 모든 씨족들이 수십 대 먼 조상, 특히 아득히 먼 시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말았다 하거니와 우리도 9백여년의 역사를 내려오면서 시조 상주국공의 실묘를 실전한 슬픔을 겪었으니 자손된 자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성(陽城) 옛 노인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시조의 유지가 양성 구내(九內) 지금 향교의 곁이라 하며, 묘소는 그 뒤쪽 몇 리쯤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 양성 구천리(구만리)와 반곡(盤谷) 또는 서리실이 옛터라고 하는 말도 있다고 한다. 상세의 묘소가 실전되면 고래의 선유지제(遺之制)에 따라 묘소가 있었던 근역에 단을 모으고 그 지역조차도 잃었으면 하사받은 땅, 또는 그 씨족을 위하여 마련된 단산소를 설단하는 전례가 있다.

  1838년 헌종4년 5수보(무술보) 시, 5수범례(五修凡例)에 의하면 서문을 쓴 22세 헌의(憲義) 등의 창의로 장차 양성 천덕산(天德山)에 제단을 설치하여 세향(歲享)을 모시기로 하고 제파 자손들이 성금을 내어 위토답을 마련하여 세향을 받들기로 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로부터 10년 후 1848년 헌종 14년 무신(戊申) 음10월1일 비로소 시조로부터 5세까지의 단을 석탄공 6세 수방(守邦)의 5세손 마전공 10세 유직(攸直) 묘소의 우록, 현 세장산 시조 묘역인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산43의 7 유좌지원에 설단하고 세세연년 음10월 1일에 세향을 받들어 오고 있다.

  이렇게 볼때 우리 종중은 1848년 음 10월 1일을 시작으로 165년간 오늘날까지 매년 평택의 시조묘역에서 세향을 봉행해 왔고, 그 기회에 종중 일을 의논하는 전국적인 종회(宗會)의 역할을 이미 해온 것을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