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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의 역사 > 충효절의 > 효자정려

-▶ 이백자(李伯孜):생몰년 미상

  시조 상주국공의 9세손. 판군기시사 징()의 아들. 벼슬은 대경, 훈신, 건공장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이고 홀어머니인 진주유씨(晋州柳氏)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혹시 화를 내어 종아리를 때려 피가 흘러도 안색을 변한 적이 없었으며, 혹 병이 나면 약을 달여 간호하되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았고, 똥을 맛보아 달면 마음속으로 더욱 근심하여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않고 하늘에 읍소(泣訴)하며 자기가 대신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병이 낫지않고 돌아가시니 묘소 곁에 살면서 흙덩이를 베고 점차(次:부모 상중에 있는 거처)에서 자면서 수시로 애통해 하였고, 일찍이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3년을 마쳤으며, 어머니가 평시에 뇌성을 몹시 두려워하여 어쩔줄을 몰라 했는데, 3년간 분묘를 지키는 동안 뇌성과 열풍이 갑자기 오면 비록 밤이라 할지라도 분주히 달려가서 무덤 위를 몸으로 덮고는 뇌성이 그치기를 기다려 생전과 같은 효도를 한 효자로 1434년 세종16년 2월3일 예조에서 세종께 아뢰어 만세불망 흑각패의 포상을 받다.(전북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양성골)(1-57)

 

-▶ 이순지(李純之):1406 ~ 1465

  자 성보(誠甫). 시호 정평(靖平).. 시조 상주국공의 10세손. 병조판서 맹상(孟常)의 아들. 1427년 문과에 급제. 1434년 세종명으로 의상을 교정, 간의·규표·천평·현주·앙부일구·보루각·흠격각의 자격루 등을 이룩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효성과 총명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1436년 모친상을 당하여 극진한 효성으로 3년시묘를 위한 여묘살이 하다가 호군직에 특진발령되었는데 지사간인 아버지 맹상(孟常)에게 전교하여 아들을 취임토록 명하다. 그러나 공은 ‘신이 나서 병이 많아 다섯 살때까지도 아직 말을 못하고 먹지 못하여 항상 포대기에 뉘였었는데, 어머니가 고생스럽게 품에 안고 업으시며 유모에게 맡기지 아니하였고 몸소 친히 길러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또 평상시에 신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여러 아들 중에 오직 몸소 젖을 먹여 길렀으니 내 무덤에 시묘할 애는 반드시 이 아이다’라고 했다는 등의 내용으로 상소를 두 번이나 올려 상을 마치게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예조·호조참판, 한성부윤, 1458년 공조참판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동지중추원사, 판한성부사, 지중추원사, 1465년 판중추원사, 상호군에 오르다. 원종공신 2등(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산5의 1) (1-36)

 

-▶ 이형지(李亨之):생몰년 미상

  별검(別檢). 시조 상주국공의 10세손. 장령 계상(季常)의 아들. 은진(恩津) 사람인 공은 1417년 태종7년에 아버지가 병고중에 있을 때, 설리를 맛보아 생사를 징험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3년을 려막에 의지해 있으면서 삼띠(수질과 요질)를 벗지 않았으며, 거적자리에 흙덩이를 베고 자며 죽만을 먹어 얼굴이 몹시 검었으며, 흙과 돌을 져다가 스스로 분묘를 법도에 맞추어 지었고, 1430년 세종12년에 또 모친상을 당해서도 역시 그 분묘를 지키며 동구밖을 나가지 않고 3년간을 눈물속에 지나면서 일찍이 웃는 낯을 보이지 않았는데, 부모의 상고를 당하여 그 분묘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무릇 6년간 시묘한 효자로 1434년 세종16년 3월 22일 예조에서 세종께 아뢰어 서용이 되다. (1-40)

 

-▶ 이승소(李承召):1422 ~ 1484

  자 윤보(胤保), 호 삼탄(三灘), 시호 문간공(文簡公), 시조 상주국공의 11세손, 증 의정부 좌찬성 적성군 온()의 아들. 1438년 진사시, 1447년 문과 및 중시에 3장 장원한 수재이다. 공은 1434년 13세 무렵 효도에도 남다른 바 있어 늘 해주 수양천(首陽川) 삼탄(三灘)에서 형제와 더불어 물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보양하였으니 공의 삼탄집 수양음(首陽吟)에 잘 나타나 있다. 백형인 승주(承周)공이 1441년 세종 2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조서(早逝)한 이후에도 남달리 우애롭고 효심이 지극한 공은 1466년 45세시 가을에 모친상을 당하고 2개월만인 연말 겨울에 부친상을 당함에 충청도 관찰사를 사직, 해주 화산(花山)에서 3년 시묘하면서 애통한 나머지 빈사상태에 빠졌는데 세조가 공이 상중에 있으면서 병이 매우 심하다는 말을 듣고 주서(注書)를 보내어 주육(酒肉)과 의약을 내리니 공이 몹시 중태인데도 정신을 가다듬어 감사의 사연을 입으로 불러 받아쓰게 하여 1467년 세조 13년 2월 12일자 ‘사 사의약선온진수전(謝 賜藥仙珍羞箋)’이란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니 세조는 시신(侍臣)들에게 회람시키며 “이 사람의 정신이 이러하니 반드시 죽지 않으리라.” 하였는데 과연 병이 낳았다. 이 3년 시묘후 1468년 가정대부예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춘추관 동지사에 제수된 것이다. 그후 순성좌리공신 4등, 숭정대부 지충추부사 양성군이 되다. 당대의 대문장가로 저서 삼탄집(三灘集)이 있고 충주 청간사(淸簡祠) 부조묘에 배향하다.(충북 충주시 이류면 매현리 536 서당동) (1-12)

 

-▶ 이원수(李元守):1456 ~ 1521

  자 선원(善原). 어모장군 충무위부사직. 시조 상주국공의 12세손, 호조참판 공(拱)의 아들. 음관으로 출사하여 벼슬이 3품까지 올랐다. 천성이 효우하고 지행(志行)이 고결하였으며, 온유한 성품이 밖에까지 풍겨 누구나 친하지 않은 이 없었다. 그러나 편히 물러서서 명리(名利)를 구함이 없었고 세간의 공명에 급급하지 않았으니, 벼슬은 이를 마치고 더 이상의 고관에 이르지 않았다. 1519년 모친상을 당하여 려묘생활중 2년을 지나 1521년 12월에 병졸하니 66세였다.(경북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 산5의 1) (1-148)

 

-▶ 이백근(李百根):1521 ~ 1591

  자 자고(子固). 시조 상주국공의 12세손. 훈(壎)의 아들. 1552년 생원시에 합격. 공의 성효(誠孝)가 출천(出天)하여 6년을 시묘하니 산에 버섯이 두루 나는 상사(祥事)가 생겨 춘추에 시들줄 모르고 계속 돋아나서 이를 따서 공제(供祭)하였는데, 려묘막을 철수한 이후로는 다시 나지 않았다. 이는 효행이 감천한 일이라 하여 향인들이 공의 효행을 기술하여 순영에 보고했다. 그리하여 정려의 은전이 곧 내리려던 차에 때마침 임진란이 터져 중지되고 말았다.(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남촌) (1-281)

 

-▶ 이  훈(李  薰):1483 ~ 1540

  자 자형(子馨). 부사직, 금위, 중훈대부. 시조 상주국공의 13세손. 부사직 원수(元守)의 아들. 효성이 남달리 뛰어나 부모님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데 정성을 다하도록 노력하였다. 친상을 당하자 묘움막에서 6년을 시묘살이 하였는데, 집안일은 일체 놓아버리고 몸소 부엌에 들어가 제물을 장만하여 올리되 노역으로 여기지 않았다. 겨우 죽만 들고 슬퍼함이 지나쳐 몸은 여윌대로 여위니 체제를 지나칠 만큼 엄수했기 때문이다. 6년시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조석으로 사당에 배알하는 예를 빠뜨리지 않았고 노경에 이르도록 게을리 함이 없었으니 그 지극정성의 효를 칭송하지 않는 이 없었다. 일선지(一善誌) 및 퇴계선생 찬명(撰銘)에 실리고 구미의 효사정(孝思亭), 의성의 백천서원에 배향.(경북 구미시 산동면 인더리 산5의 2) (1-148)

 

-▶ 이성헌(李成憲):1506 ~ 1565

  자 문경(文卿). 호 학수(鶴秀). 시조 상주국공의 13세손. 금화사별좌 선(宣)의 아들. 명종조에 효행으로 이름나 시인이 황륙지효(黃陸之孝)라 하다. 이 효행으로 특히 진원(珍原)·정읍(井邑)현감과 한성부판관을 역임하다.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이 행장을 지었다.(전남 함평군 유산) (1-172)

 

-▶ 이광익(李光翼):1520 ~ 1592

  자 공좌(公佐). 호 애일당(愛日堂). 시조 상주국공의 13세손. 사복시정 함()의 아들. 김하서(金河西)의 문인.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에 쫓아 즐겁게 해드리고, 부모가 병들었을 때 똥을 맛보고, 전후상에 피눈물로 3년간 려묘한 효행으로 중종때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사하다. 임란이 일어나자 생질 김천일, 종제 광주를 불러 국난에 순하도록 격려, 격문을 양산숙, 고경명에 보내 선등하도록 권고하고 행재소로 가다 공주서 사망하다. 나주 정렬사에 배향되고 나주지에 실리다.(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1-188)

 

-▶ 이영남(李英男):1566 ~ 1598

  자 사수(士秀). 시조 상주국공의 13세손. 부사직 사종(嗣宗)의 아들. 12세때 아버지 부사직공과 어머니 광주진씨(廣州陳氏)가 동시에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밤낮없이 울음으로 간호에 정성을 기울였으나 동시에 부모상을 당하여 3년시묘까지 하여 어른도 따를 수 없는 효도라고 모두 칭찬하다. 1584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 훈련원첨정, 도총부경력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에 원균 휘하 율포만호로 이순신에게 청군, 소비포권관으로 각 해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5년 태안군수, 강계부판관, 1596년 장흥부사를 거쳐 1597년 명량해전서 승리, 1598년 가리포첨사 겸 조방장으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했다. 선무원종공신 1등. 증 병조판서, 고금도 충무사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충북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 산88의 4) (1-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