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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의 역사 > 충효절의 > 항일독립운동

-▶ 이상신(李相信):1888(고종25) ~ 1957

  독립운동가.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竹栢洞) 출생. 자 흥도(興道). 시조 상주국공의 23세손. 용해(龍海)의 아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기점으로 독립만세운동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파급되자 3월 10일경에 안성읍내에서도 첫 봉화가 올랐다. 이에 자극을 받은 원곡면 내의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 등은 3월 28일 내가천리(內加川里)의 이시연(李時連) 집에 모여 4월 1일 대대적인 거사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다음 날부터 원곡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소식을 전달받고 3월 29일부터 31일까지 마을주민과 면사무소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청년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1일 오전에도 주민들과 면사무소에 나가 만세를 부른 후 해산했다. 이어 저녁에 다시 모여 시위대에게 제작한 태극기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각 마을의 주민들이 대거 참여해 시위대는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원곡면장 남길우(南吉祐)와 서기 정종두(鄭鍾斗)에게 태극기를 주면서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게 하였다. 시위대는 면장과 서기를 앞세우고 양성면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양성면의 접경지대인 성은고개에 도착한 시위대는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주동자였던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이 번갈아 연설을 하였다. 이들은 '조선은 곧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필요없기에 양성·원곡면의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를 파괴하고, 일본인을 지역내에서 축출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시위군중에게 각자 나뭇가지로 몽둥이를 만들고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돌을 준비하게 하였다.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행진하여 오후 10시경에 양성주재소에 집결, 양성면의 시위대 1,000여명과 합류하여 2,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주재소에 투석을 시작하였다. 주재소에 있던 순사 고야병장(高野兵藏)과 순사보 2명은 못본 척하면서 슬슬 도망했다. 대형 태극기를 휘둘러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횃불로 주재소의 건물과 숙직실을 방화하였다. 이어 마을의 인가속에 있던 우편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은 끌어내 소각하였다. 또 주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고 협잡을 일삼던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한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인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방화했다. 이때 청년들은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신주를 절단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귀가하면서 다음날 새벽 4시경 원곡면 사무소를 파괴·방화하고 이어 평택(平澤)으로 나아가 경부선 철도의 운행을 방해코자 하였으나 일제의 진압대가 원곡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량을 파괴한 후 산속으로 피신했다. 이후 일제의 가족에 대한 협박과 원곡면장의 회유에 의해 동료들과 함께 4월 19일 마을 뒷산에 모였다가 체포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건조물 방화죄.소요 선동죄·보안법 위반 등으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공로로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평택시 죽백동의 선영에 있다.(5-147)

 

-▶ 이영진(李泳震):1867 ~ 1937

  독립운동가. 파주시 법원읍 출생. 자 공윤(孔允).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준겸(俊謙)의 아들.
  거국적인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의 우산 심상각의 주도하에 백익수(白翼洙)·이학로(李學魯) 등과 함께 각 면의 대표로 19인의 결사를 조직하여 그 본부를 광탄면 발랑리(發郞里)에 두고 군민의 동원 시기·운동의 시행방법을 결정하여 각 면에 전달하였다. 공릉(恭陵) 시장의 장날인 3월 27·28·29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파주군민은 물론 고양군민의 일부까지 동원하여 참가한 시위대는 5천여 명에 달했다. 시위대가 봉일천 주재소를 에워싸자 당황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10명의 사상자와 7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시위 운동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로 얻은 신병으로 고생하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978년 3월 1일 건립된 <파주 3·1운동 기념문>에 파주의 3·1운동을 주도한 1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3-360)

 

-▶ 이능권(李能權):1864(고종1) ~ 1909

  의병장. 강화읍 국화리(菊花里) 출생. 호는 능한(能漢).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정환(鼎煥)의 아들.
  의병장 이능권부친의 권유로 군에 입대하여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고종의 밀서(密書)를 가지고 파리의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가하는 이준(李儁) 열사의 호송을 한국 군대의 육군대장으로서 맡게되었다. 일본수비대의 엄중한 감시망을 따돌리고 무사하게 연해주까지 이준 일행을 호송하였다. 1907년 8월부터 한말의 구한국군대가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같은 소식을 접한 강화진위대의 장교들은 전진위대장 이동휘(李東輝)와 상담하여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하였다. 8월 2일 전등사(傳燈寺)에서 이동휘·연기우(延基羽)·지홍윤(池弘允)·유명규(柳明奎) 등과 밀의하여 거의하기로 결정했다. 이같은 사실을 주민들과 병사들에게 전달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병영으로 돌아와 작전계획과 수비대의 배치, 식량의 확보 등을 점검하고 일본군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에 총기유출과 탈영사건이 일어나자 강화헌병대는 군대해산식을 예정보다 2일 빨리 시행하였다.
  8월 9일 5시 병사들을 집합시켜 해산식을 거행하고 군율에 복종할 것을 전하고 급료와 여비를 주며 군기와 군복은 반납받아 창고에 넣었다. 울분에 북받친 병사 하정도(河正道)가 무기고를 습격하자 50여명도 동참하여 무기와 탄환을 탈취하여 무장하고 대오를 정비하였다. 연기우·오윤영·유명규 등과 시위대를 지휘하여 파출소를 습격, 순사 1인을 사살했다. 이어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군수인 정경수(鄭景洙)를 찾았으나 이미 도주한 뒤였다. 이후 정경수가 영정포(領井浦)에서 오윤영(吳允榮)의 의병진에 체포되자, 일진회 강화지부장 양학진(梁學鎭)과 함께 강화읍 동문 박에서 사살하였다. 이들은 11일까지 일본진압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강화도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포화가 집중되면서 무기와 탄환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연기우는 장단(長湍), 지홍윤은 해서방면으로 대원을 이끌고 탈출하였고 그는 부교(副校)인 오윤영·김동수(金東秀)와 함께 잔류병을 수습하여 서문을 나와 산속으로 들어갔다. 1908년 의병진을 대동창의진(大同倡義陣)이라 칭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의병진을 게릴라전법에 적절하게 20~30명을 단위로 편성하고 양사면(兩寺面)의 철산리(鐵山里)·화도면 덕포리(德浦里)·교동도(喬桐島) 등지를 무대로 활약하였다.
  의병진은 주민들의 정신적·경제적인 지원에 힘입어 장기항전을 개시할 수 있었다. 무기구입 자금을 위해 부호가의 자발적인 협조를 부탁했으며 여의치 않으면 무장하여 강요했다. 1908년 일본군 200여명이 공격해오자 이들을 초지진(草芝鎭)으로 유인하여 100여명을 사살하는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8월경에는 양도면 길정리(吉亭里)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연기를 피우고 역습하여 오히려 적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항전이 장기화되고 고립되면서 의병진이 분열되고 탈락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마을의 이장을 대상으로 군수품의 조달을 부과하였기에 이들 중에서 밀고자가 나와 그만큼 활동은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일제의 집요한 추격전이 시작되어 육지로의 탈출은 불가능했다.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군수품의 조달을 위해 이호춘(李浩春)·유성준(兪成俊)·김추옥(金秋玉)을 파견하여 11개소에서 숨겨둔 약 43,800냥을 조달했다. 또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전등사에 숨겨둔 무기를 일본군에게 넘겨준 송계찬(宋戒燦)을 이적행위자로 처단했다. 그후 수도 탈환코자 한양에 잠입했다가 간교한 역도의 밀고로 일제의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어 1909년 9월 27일 경성공소원에서 강도 및 모살죄로 교수형이 확정되어 11월에 순국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575호)이 추서되었다. 묘는 대전국립묘지 순국선열 묘역에 있다.(4-283)

 

-▶ 이판렬(李判烈):1919 ~ 1945

  독립운동가. 자 화백(花白).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병화(柄華)의 아들. 1940년부터 1944년 9월까지 고창에서 일제에 항거 항일투쟁을 하다가 4개월의 징역복역 후 27세로 사망하다. 이 자주독립운동에 헌신노력한 공으로 1982년 대통령표창 추서받다.(4-387)

 

-▶ 이동연(李東衍):1881 ~ 1909

  항일의사. 자 춘삼(春三).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병환(炳煥)의 아들. 을사보호조약후 죽봉(竹峯) 김태원(金泰元)의사와 함께 나주 문평동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절사했다.(호남절의록) (4-472)

 

-▶ 이규봉(李圭鳳):1873(고종10) ~ 1961

  교육자·독립운동가.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출생. 자는 기남(沂南). 호는 목천(牧川).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교영(敎英)의 아들. 한학에 몰두하여 12~3세에 경서를 통달, 재질을 인정받았다. 이후 5~6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여 관직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했다. 1893년 가평읍내의 김영문(金泳文)의 자제들을 교수하기 시작하여 이 일대에서 명망을 얻었다. 1895년 을사사변(乙巳事變)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장 이충응(李忠應)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902년 이준(李儁)과 교유하면서 근대학문에 심취하여 새로운 지식의 습득에 노력하고 이를 토대로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진보회(進步會)·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하여 일시적인 활동을 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에 일진회가 앞장서자 탈퇴하였다. 1906년에는 가평의 김재영(金在)의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주위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사업을 펼쳤다. 이후 가릉보성학교(嘉陵普成學校) 한문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초동목수(樵童牧竪)의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를 위한 국문 보급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에는 수원농림(水原農林)하교에서 교원강습을 받아 농사기술의 보급과 경제림육성에 앞장섰다. 1914년에는 교직원을 사직하고 양잠업에 종사하면서 서당운영에만 심혈을 기울여 민족정신의 함양에 힘썼다. 또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들이 경작지를 침탈당하자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을 규합하여 일본인과 악덕지주의 배척운동에 노력하는 대서업을 개업하여 이들의 권익옹호에 전념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을 보려 서울로 갔다가 3·1운동을 보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휴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동생 규붕과 장남 윤석(胤錫)·정흥교(鄭興敎)·최종화(崔宗和) 등과 화합하여 3월 1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인쇄하여 각처에 전달하며 곳곳에 붙였다. 또 청년들을 중심으로 행동대를 조직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준비가 진행되자 3월 15일 주민들을 동원, 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벌여 인근 주민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저녁에는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르고 횃불을 올려 조국의 독립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기도 했다. 3월 16일 예정대로 마을의 이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을 동원하여 가평읍내에 집결하니 시위군중은 무려 4,000여명에 달했다.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후 군청으로 향했다. 시위대의 행동이 격렬해지자 일본군은 해산하여 귀가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군중은 이를 무시하고 저지선을  뚫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해산하지 않자 총기를 발포하여 강제 해산시키고 행동대와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재빨리 현장을 벗어나 춘천으로 피신하여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곳에서 3년여 동안 남종리(楠淙里) 예배당을 중심으로 아동교육을 실시했다. 1924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목동강습소를 개설하고 이듬해에는 강습소부설 여자강습소를 설치하여 여성교육에도 관심과 정성을 쏟았다. 1927년에는 춘천 우두상리(牛頭上里)로 가족을 거느리고 이사하였다. 이후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신품종의 개량과 보급운동에 힘썼다. 1948년에 춘천지방의 노인친목단체인 구로회(九老會)를 조직하고 경로효친사상의 정착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같은 지역사회에 대한 공로로 1956년 춘천문화협회장상을 수상하였다.(4-809)

 

-▶ 이규붕(李圭鵬):1875(고종12) ~ 1950

  독립운동가.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출생. 자는 도여(圖汝). 규봉(圭鳳)의 제.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교영(敎英)의 아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가평에서도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행동대원으로 가담했다. 형 규봉이 서울에 갔다가 독립신문과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장남인 윤석(胤錫), 최종화(崔宗和) 등과 모의하여 3월 16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사본으로 제작하여 배포하고 격문도 동리의 입구마다 붙였다. 또 청년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마을의 책임자에게 수시로 연락을 취하여 준비상황을 파악했다. 형을 도와 연락을 담당하였고 시위의 선두를 이끌어갈 청년행동대를 조직하였다. 3월 15일 유성남(柳成男)·권순(權洵)과 더불어 북면(北面)에서 주민 2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면사무소·보통학교 등지를 다니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이튿날에는 마을의 주민들과 가평읍내로 진출하니 벌써 시위군중은 2,000여명이나 운집하고 있었다. 청년행동대와 선두에서 대오를 편성하고 읍내를 행진하자 인근 주민들이 호응하여 시위대는 4,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와 함께 군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헌병대가 있는 주재소를 향하다가 일본군의 저지를 받게 되었다. 이들이 저지선을 돌파하려 하자 일본헌병은 공포를 쏘아 해산시키고 주동자와 행동대원 20여명을 검거했다. 재빨리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다음날인 3월 17일에도 체포자의 석방을 위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등 가평지역의 3·1운동에 있어 행동대원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4-811)

 

-▶ 이양섭(李陽燮):1881 ~ 1925

  독립운동가.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출생. 자 명여(明汝), 아명 춘광(春光).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상기(相夔)의 아들.
  3·1민족해방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1919년 4월 1일 원곡면의 최은식(崔殷植)·이근수(李根洙)·홍창섭(洪昌燮)·이덕순(李德順)·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하여 양성면·원곡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오후 8시경 1천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 소재 원곡면 면사무소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일본인 면장을 끌어 내어 이를 선두에 내세우고서 양성면으로 횃불 행진을 하였다. 이 시위대가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양성면 경찰주재소에서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던 1천여명의 양성면 시위대가 여기에 합세함으로써 2천여명에 달한 시위대는 오후 10시경 다시 양성 경찰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이때 짚이 없어서 주재소를 방화하기가 어렵자 주재소에서 5리나 떨어진 곳에서 짚을 구해다가 홍근배(洪根培)와 함께 처음으로 건물과 기물에 방화하였다. 이리하여 시위대는 몽둥이로 유리창 등을 파괴한 후 불을 질러 주재소와 부속 순사기숙사 1동과 공용서류·물품·가구 등을 전부 소각하였다. 이어 시위가 더욱 격렬하여지자 양성 우편소로 가서 사무실과 전화기·공용서류·물품 등을 전부 파괴하였다. 또 일본인 잡화상 외리여수(外里與手)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습격하여 대문짝·가구·물품 등을 강탈·파괴 또는 방화하였다. 이어 양성면 면사무실을 습격하여 사무실의 공용서류·물품 등을 파괴하고 이날 시위를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4시에 원곡면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집결한 시위대와 함께 원곡면 면사무소를 습격·방화하여 사무실 1동과 공용 서류·물품 전부를 파괴하는 격렬한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내란죄·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건조물 손괴·소요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형무소에서 7년째 옥고를 치르던 중 감옥내의 마루창까지 파손시키면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모진 악형과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5-129)

 

-▶ 이현직(李鉉稷):1894 ~ 1930

  독립운동가.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달주(達)의 아들. 정평서 항일투사로 옥사하다.(5-412)

 

-▶ 이현목(李鉉穆):1898 ~ 1917

  독립운동가. 사상가.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근주(近)의 아들. 정평서 항일투사로 옥사하다. 
(5-413)

 

-▶ 이동선(李同善):1903 ~ ?

  독립운동가. 시조 상주국공의 24세손. 흥주(興)의 아들. 정평의  항일독립투사로 체포되어 복심법원에서 4년을 언도 복역하다.(5-456)

 

-▶ 이효진(李孝鎭):1920 ~

  항일독립투사. 자 원백(源百). 시조 상주국공의 25세손. 규(珪)의 아들. 재중항일독립단원으로 옥고 2년. 저서 '증산상제통일진법 대성경집’외 6권 다수.(3-230)

 

-▶ 이봉식(李鳳植):1900 ~ 1982

  독립운동가. 자 치서(致瑞). 시조 상주국공의 25세손. 독립운동가 영진(泳震)의 아들. 일제시 항일운동 30년간 영오생활 7차 겪다. 광복 후 반민특위조사관으로 활약하다.(3-360)

 

-▶ 이연열(李硯悅):1920 ~ ?

  독립운동가. 시조 상주국공의 25세손. 지협(智協)의 아들. 상해 임시정부에서 신익희선생과 함께 활약하다. 국민훈장 수여(홍원)(3-667)

 

-▶ 이윤석(李胤錫):1894 ~ 1953

  독립운동가. 가평군 북면 목동리 출신. 호 자운(紫雲). 시조 상주국공의 25세손. 독립운동가 규봉(圭鳳)의 아들.
   조부 이교영(李敎英)과 부친에게서 한학을 수학하고 가평의 가릉보성학교(嘉陵普成學校)를 졸업하였다. 또 양주의 양잠강습소(養蠶講習所)를 수료하고 이곳의 교사로 있다가 1913년 양평육영의숙(楊平育英義塾)의 교사가 되었다. 1919년 3·1민족해방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3월 15일 가평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시위운동을 정흥교(鄭興敎)·장기영(張基榮) 등과 함께 주동하였다. 3월 14일 정흥교와 독립선언서를 보고 만세시위 계획을 상의하여 3월 15일 오전 9시경 북면사무소에 독립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3월 15일 오전 9시에 가평 일대에서 독립시위 운동을 전개하니 참여하라는 격문을 2통, 정흥교가 1통을 작성하였다. 이곡리·목동리·화악리·소법리 일대의 연락을 담당하였으며 정흥교는 적목리·단녕리·과대리·백비리 일대를 담당하였다. 이에 격문 1통을 이만석(李萬錫)에게 주고 나머지 1통을 정재명(鄭在明)에게 건네 주어 북면 일대의 주민들에게 연락하도록 하였다.  3월 15일 오전 9시 수백 명의 시위대를 지휘하여 자신이 만든 태극기 10여 개를 선두에 내세우고 군청으로 행진하여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학교와 면사무소를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정흥교 등 1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헌병대 분견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다음날 장기영(張基榮)·장호리(張浩利) 등이 주동하여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결국 구속되어 이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위반과 소요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6월 21일 세례를 받고 1922년 기독교 대한 감리회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한 뒤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34년 홍천 모곡에서 남궁억(南宮檍)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무궁화사건'·'조선역사사건'·'십자가당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장단(長湍)교회와 가평교회 목사로 재직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 강원도위원회 총무를 지냈다. 1948년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한의원을 개업하였다. 6·25 뒤에 가평교회를 담임하면서 가이시중학교를 인수하여 그 운영 위원장이 되었다. 1977년 12월 13일 국가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45300호)을 추서받았다.(4-809)

 

-▶ 이만석(李萬錫):1902 ~ 1950

  독립운동가. 가평군 북면 목동리(沐洞里) 출생. 자 준석(準錫). 시조 상주국공의 25세손. 규홍(圭鴻)의 아들.
  1919년 3·1운동이 파급되자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활약하였다. 3월14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가평읍의 정흥교(鄭興敎)에게 도착하자 독립만세를 일으키기 위해 정흥교·이윤석(李胤錫)·정기복(鄭基福) 등과 모였다. 이들은 “세계 만국공회에서 모든 속국은 독립하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독립하게 되었다. 가평에서도 음력 2월 14일(양력 3월15일) 아침 9시에 모든 사람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의 격문을 인쇄하였다. 격문은 정기복이 목동리·화악리(華岳里)·소법리 등의 삼거리에 붙이고, 그는 정재명(鄭在明)과 함께 격문을 가지고 직접 동지의 규합에 나섰다. 그 노력으로 장기영(張基榮)·정성교(鄭聖敎)·최종화(崔宗和)·이홍복(李弘福)·홍종선(洪鍾先)·정효섭(丁孝燮) 등 20여명의 동의를 얻었다.
  3월 15일 동지들은 주민들을 인솔하여 북면사무소에 집결하였다. 시위군중의 대오를 조직한 후 청년들과 선두에 서서 군청으로 향했다. 행진 중에 인근의 주민들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1,000여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은 학교·면사무소·군청 등지를 돌면서 시위운동을 벌였다. 면장과 헌병·경찰관 등은 시위대의 숫자가 증가되자 헌병대를 동원하여 이윤석·정흥교 등 10여명을 체포하여 헌병대로 압송하자 더욱 격렬하게 항의하여 석방을 요구했다. 3월 16일 오전 7시경 체포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서낭당고개에 200여명의 주민들과 모였다. 장기영은 평화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해 구출해야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고개를 내려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헌병대는 해산을 종용하였다. 장기영과 함께 석방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끝까지 평화적으로 저항할 것을 결의했다. 헌병들이 체포하려 하자 시위군중은 돌을 던지며 격렬한 기세로 돌진하려는 순간, 헌병은 겁에 질려 도망하였고 시위군중이 가평읍내로 진출하자 증원부대가 이를 저지하며 주동자를 체포하고 공포를 발사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이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행방불명되었다.(4-812)

 

-▶ 이규창(李奎昌):1900 ~ 1970

  한학자·독립운동가.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竹栢洞) 출생. 호 성남(星南). 시조 상주국공의 25세손. 문묘직원 관섭(觀燮)의 아들.
  1919년 3·1운동의 여파는 안성지역에도 미쳤다. 3월중순경 서울에서 3·1운동의 만세시위를 보고온 최은식(崔殷植)·이덕순(李德順) 등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일과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3월 28일에는 내가천리(內加川里) 이시련(李時連) 집에 모여 4월 1일 일제히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4월 1일 오전 이양섭(李陽燮)·이덕순 등이 참여를 권유하며 주민들을 동원하자 주민들과 더불어 원곡면사무소로 갔다. 1,000여명의 시위대는 면장과 면서기를 선두에 세우고 태극기를 주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한 후 양성으로 향했다. 양성의 경계인 성은고개에서 독립만세의 취지와 시위에서의 행동방침을 전달하여 각자 몽둥이와 돌 등으로 휴대하고 9시경 양성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양성면민들과 합류 시위군중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주재소로 몰려가자 순사와 순사보들은 기세에 눌려 도망가고 없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고 횃불과 돌을 던져 주재소를 방화했으며, 양성우편소도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는 소각하였다. 또 우편소 근처의 전신주를 도끼로 절단해 통신을 두절시켰다. 동항리(東恒里)에 있던 일인 잡화상 외리여수(外里與手)와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도 습격하고 이어 면사무소도 파괴했다. 시위군중은 뒷산으로 올라가 횃불로 연호하며 독립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였다. 원곡의 시위대는 귀가하면서 4월 2일 새벽 4시에 원곡면사무소의 건물을 습격 방화하고 해산했다. 이후 일본의 진압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주동자와 참가자들은 다른 곳의 친척집이나 인근의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일본의 회유책에 의해 체포되어 안성경찰서로 압송 갖은 고문을 당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소요선동죄·건조물 방화죄 등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석방후 고향에서 한학을 가리키며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3·1운동에 대한 공으로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5-132)

 

-▶ 이문섭(李文燮):1874(고종11) ~ 1939

  독립운동가. 파주시 법원읍 대릉리 출생. 호 준상(俊相). 시조 상주국공의 26세손. 병원(秉元)의 아들. 심상각의 문인.
  1919년 3·1운동이 서울을 시발로 지방에 파급되자 파주에서도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이 계획되었다. 주동자인 심상각은 광탄면 발랑리(發郞里)에서 이문섭·권중환(權重煥)·박우용(朴禹鏞)·김웅권(金雄權)·염규호(廉圭鎬)·윤영두(尹永斗)·황학주(黃鶴周) 등 19명과 회합하여 장날인 3월 28일로 거사일을 결정했다. 이들은 각자 마을로 돌아가 태극기를 제작하고 동원주비를 비밀리에 진행시켰다. 3월 27일 조무쇠(曺茂釗)·이인옥(李仁玉) 등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책임자의 인솔하에 주민들이 동원되니 2,000여명에 이르는 대군중이었다. 심상각은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과 앞으로의 행동에 있어 절대로 폭력을 행사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면사무소를 출발하여 장터를 행진하자 이에 가담하는 자가 많아 시위군중은 5,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리면 봉일천리(奉日川里)로 행진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함께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군경은 무차별하게 발포하여 강복산(姜福山)·김남산(金南山)·박원선(朴元善) 등 10여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6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이때 체포되어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묘는 파주시 법원읍 대릉3리 선영하이며 기념비는 광탄면 발랑리와 조리읍 봉일천리에 있다.(3-91)

 

-▶ 이원행(李源行):1889 ~ 1939

  독립운동가.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 출생. 자 효중(孝仲). 시조 상주국공의 26세손. 현진(鉉鎭)의 아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26일 송산면 사강 장터에서 홍성후(洪誠厚)·이재항·홍대규(洪大奎) 등과 함께 주민 봉기에 나설 것을 계획하고 밤새워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준비를 하였다. 3월 27일부터 시작된 시위 운동은 송산면민과 합세하여 28일 사강 장날을 이용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에 일경과 헌병은 마을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전곡리(全谷里) 홍대우 지사를 학살하였으며 집도 방화하여 전소(全燒)시켰다. 이후 해외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톡·하얼삔·상해 등지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서신 학술강습소를 개설하고 애국정신 고취를 위한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다.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 419에 세워져 있는 '3·1 독립운동기념비’에 공적이 명기되어 있다.(3-721)

 

-▶ 이내기(李來冀):1888 ~ 1950

  자 성철(聖哲). 시조 상주국공의 26세손. 부호군 동수(東洙)의 아들. 경술합방때 한말 의병대장으로 기병. 한말 요인과 더불어 왜적을 격파하고자 원세개에게 청병, 내락을 얻고 출병하고자 하였으나 중국의 남북전쟁으로 미성공 피체되다. 출옥후 애족심으로 양현여학교를 창설하다.(진천)(4-166)

 

-▶ 이봉래(李鳳來):1913 ~ ?

  독립운동가. 시조 상주국공의 26세손. 영표(永杓)의 아들. 정평의 항일독립투사로 체포되어 복심법원에서 2년 6월 언도되어 옥고를 치루다.(5-445)

 

-▶ 이일신(李一信):1909 ~ 1988

  독립운동가. 충주출생. 시조 상주국공의 28세손. 혜원(惠元)의 아들. 1929년 서울 중동고보에 재학중 전국 중등학생 웅변대회에서 3등을 하고, 그 해 12월 3일 '서울학생독립운동’을 주동하여 1930년 12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1935년 4월 인도 주최 '동방약소민족동맹’에 조선대표 참석을 동지들과 협의하고 박용칠선생이 귀국후 황해도 백천으로 피신했다가 피검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또한 1937년 왜관경찰서에 구속되어 옥고를 치루는 등 광복때까지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다. 2002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한편 고향인 충주시에서는 충북 충주시 이류면 대소리에 2005년 3·1절날 공의 독립유공자 추모비를 세웠다.(6-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