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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검(李思儉) 묘(墓)

- 규  모:약 1,600평
- 소재지: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213-4
- 사적개요(事蹟槪要)

  이 묘는 양성이씨 이사검(李思儉)을 안장한 유택이다. 이사검[1381년(우왕 7)~1446년(세종 28)]은 양성이씨 9세손으로 정절공 옥(沃)의 아들이다. 1408년 양녕대군 북경 조하(朝賀)시 종사관으로 배행 그후 진응사, 조하사 등 전후 4차에 걸쳐 중국 사신으로 다녀왔다. 1418년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 부좌관(傅佐官)으로 임명되어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황해도 수군첨절제사, 판의주목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종비 소헌왕후 서거시 국장도감제조가 되어 임무를 마치고 1446년 8월 29일 지중추원사로 세상을 떠나니 1일(一日) 철조(輟朝)하고 공소(恭昭)의 시호가 내렸다. 서거후 백일장(百日葬)으로 1446년 12월 9일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산 213-4에 간좌로 모셨으며 1988년 3월 22일 포천시 향토유적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묘전(墓前) 무인석의 모자가 투구형이며 이 모양은 그가 진응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하사한 투구 모양과 같은 것이라 전한다. 아들은 송죽헌 이휘(李徽)인데 공조참의로 1456년(세조 2) 사육신인 성삼문 및 이개(이휘의 처남)와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숙종조에 신원되어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사육신과 함께 배향되고 공소공은 양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장녀는 직예문관 안동 김맹헌(金孟獻)에게 출가하였는 바 이휘의 자손이 흑화를 피하여 멀리 나주로 숨어 자취가 묘연했던 장장 528년간을 외손인 안동김씨 문중에서 봉사해온 눈물겨운 일화가 숨어 있으며, 1984년에야 본손(本孫)봉사로 환원되었다. 향사는 매년 음력 10월 1일후 첫째 일요일이다.


♠ 이사검(李思儉) 선생 묘

- 향토유적 제38호
- 소재지: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213-4
- 사적개요(事蹟槪要)

  이사검(李思儉:1381~1446) 선생은 조선(朝鮮) 초기의 관리로서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개성류후(開城留後) 옥(沃)의 아들이며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조선 태종 5년(1405)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세자로 명(明)나라에 조하(朝賀)할 때 함께 다녀왔고 태종(太宗)의 명으로 세종(世宗)이 세자로 있을 때 측근에서 모셨다.
  이후 선생은 여러 관직을 거쳐 상호군(上護軍)으로 있다가 물러나 평산(平山)에 머물 때에 세종1년(1419) 왜구(倭寇)가 황해도에 들어오매 왕의 명으로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가 되어 토벌에 나섰으나 왜적을 만나 독전(督戰)하지 않았다 하여 옹진(甕津)으로 귀양당한 일도 있었다.
  세종 말년에는 송골매를 가지고 명나라에 외교 교섭차 떠났다가 요동(遼東)에서 매가 죽자 죽은 매와 더불어 명나라 황제를 알현(謁見)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장군(將軍)의 투구를 하사했다.
  세종11년(1429)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로 임명되었고 이어 공조참판, 지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세종28년(1446)에 별세했다.
  묘(墓)는 창수면 가양리에 위치해 있으며 전면에 묘비(墓碑), 무인석(武人石), 상석(床石), 제주석(祭酒石)과 사각으로 돌린 호석(護石) 위에 봉분이 있다.
  특히 무인석의 모자가 투구형이며 이 모양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형태의 투구 모양과 같은 것이라고 전한다.


♠ 이순지(李純之) 유택

- 규  모:1,500평
- 소재지: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산 5-1
- 사적개요(事蹟槪要)

  이 묘는 양성이씨 정평공 이순지(李純之)의 유택이다. 이순지(李純之)는 [1406년(태종 6) ~1465년(세조 11)] 조선 세종조 문신으로 천문학자. 수학자. 동궁행수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 벼슬에 오르고 1431년 홍문관 벼슬에 올라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 시작, 1434년 의상(儀象)을 교정하고 간의. 규표. 천평. 현주. 앙부일구. 보루각. 흠경각의 자격루를 이룩했다. 1436년 봉상판관으로 간의대에서 천문을 관측했는데 모친상을 당하여 극진한 효성으로 3년 시묘를 위한 려묘에 있다가 세종의 명으로 복직 호군직에 특진 발령되었다. 144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1443년 농지개혁을 위한 측량방법을 개발하고 저수지도 축조하였다. 1444년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고 1445년 ≪제가역상집≫ 4권을 완성 발문을 썼다. 1450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호조참의. 예조참판. 호조참판. 한성부윤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458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와 판한성부사가 되고 지중추원사. 판중추원사를 거쳐 행상호군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1984년 문공부에서 민족문화에 기여한 선현 50명중 역법제도를 확립한 업적으로 과학분야에서 선정되고 1996년 3월 문체부에서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1984년 9월 4일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 이순지(李純之) 선생(先生) 묘(墓)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54호
- 소재지: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산5-1
- 사적개요(事蹟槪要)

  조선 전기 문신이며 천문학자인 이순지(李純之:1406~1465)의 묘인데 봉분은 하나이지만 부인 영월신씨와의 합장묘이다.
이순지는 양성이씨로 세종 9년 (1427) 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역법을 연구하여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칠정산 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완성하여 조선의 역법을 확립하였고, 그 뒤 역법의 계산도 주로 담당하였다.


♠ 이세영(李世英) 묘(墓)

- 규모(規慕):400평
-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장서리 산61
- 사적개요(事蹟槪要)

  이 묘는 양성이씨 이세영(李世英)을 안장한 유택으로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이세영(1452~1510)은 양성이씨 10세손으로 자는 군실(君實)이고 1474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147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예문관 검열 대교·승정원 주서·내자시주부·사헌부 감찰·병조좌랑·형조정랑·홍문관 부교리·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1484년 봉상시첨정. 1490년 승의랑지평. 1493년 병조정랑에서 중추부 경력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 편수관으로 중훈대부 행 의정부사인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97년 사헌부 집의·홍문관 전한·직제학이 되어 연산군에게 직언하기도 했다. 1498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왕이 경연에 나올 것을 장문의 상소로 올리고 사서의 직필 등을 직언하기도 하였다. 도승지·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02년 한성부 우윤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참판이 되고 다음해 세자 우부빈객·형조참판·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 동지 경연 세자우부빈객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직언으로 연산군은 그를 의금부에 가두어 태형을 가하고 전의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으며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와 1508년 대사헌에 다시 임명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 해 개성부유수가 되었는데 1510년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명이 높았고 청간으로 여지승람신증에도 선입되었다. 향사는 매년 음력 10월 7일이다.


♠ 참의공(議公) 이휘(李徽)의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

- 동학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 숙모전:지방기념물 제18호 초헌각지
- 소재지: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 사적개요(事蹟槪要)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는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공(公)을 봉안(奉安)하여 500여 성상 제향을 받들어 오고 있다.
  동학사는 우리나라 8대 명산인 계룡산 동록, 계관준봉(鷄冠峻峰)이 병풍처럼 둘러친 유수한 곳에 기암 울림 속을 헤집고 흐르는 청계수를 앞에 두른 절경 속의 명찰이다. 이 절의 본 이름은 동계사(東鷄寺)로 백제 때 회의(懷義)가 창건, 신라 말 도선국사가 중건하였다. 그러나 동학사가 유명함은 절경 때문만이 아니라, 충절(忠節)과의 관계에서이다. 일찍이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는데 공이 컸던 아사(鵝沙) 유차달(柳車達)이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을 초혼하여 동학사 경내 동계사(東鷄祠)에 모셨고[뒤에 아사(鵝沙)도 추배], 고려 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에서 순절하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초혼하여 제사를 모셨는데 후일 목은(牧隱) 이색과 야은(冶隱)을 함께 삼은각(三隱閣)에 모셨으며[뒤에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죽헌(竹軒) 나계종(羅繼從)도 추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 및 세조 병자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순절한 사육신(死六臣) 및 함께 거의하였던 충절들을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초혼하여 제사를 모셨는데, 세조가 집권 4년만에 친히 동학사에 와서 신라·고려·조선조 3대의 충절 102여분의 위패를 초혼각(招魂閣)에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을 받들도록 했던 것이다. 고종 때에 초혼각을 중수하여 숙모전(肅慕殿)이라 개칭하고 정전(正殿)에는 단종과 단종비를 모셨으며, 역대 충신들은 동무(東)와 서무(西)에 나누어 배향되어 있는 바 송죽헌(松竹軒) 할아버지는 서무에 계시다. 춘향은 음3월 15일, 추향은 음10월 24일(단종의 승하일)인데 절후로 봐서 동향(冬享)이 되는 셈이다.


♠ 이승소(李承召)의 삼탄집(三灘集)

본 삼탄집(三灘集)은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1422 세종(世宗)4~1484 성종(成宗)15]의 문집(文集)으로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11권 369~526쪽에 실려 있는 충북 유형 문화재 제137호이다.
본집(本集)은 저자의 자(子) 희(熙)와 외손(外孫) 도사(都事) 이수동(李壽童)이 가장초본(家藏草本)을 바탕으로 수집(蒐集)·편차(編次)하여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윤금손(尹金孫)의 협조하에 1514년 함흥(咸興)에서 목판(木板)으로 간행한 초간본(初刊本)이다.
분량(分量)은 14권 5책으로 총 301판(板)이다.
본 영인저본(影印底本)은 권수(卷首)·권1~권6은 성암고서박물관 장본(誠庵古書博物館藏本)(도서번호:4-719), 권7~권9와 권13·권14·제문(祭文)·발(跋)·간기(刊記)는 종손(宗孫) 이용신(李庸信)씨 장본(藏本. 목책6책15권), 권10~권12는 서강대학교 중앙도서관 장본(西江大學校中央圖書館藏本)(도서번호:고서 삼831)으로서 반엽(半葉)은 12행 20자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23.3×15.4(cm)이다.
본 영인저본(影印底本)은 권11의 제4판(板)이 낙장(落張)이므로 중간본(重刊本)인 국립중앙도서관 장본(國立中央圖書館藏本)(도서번호:古3648-文62-1)의 권11 제4판(板) 좌면(左面)~제5판(板) 우면(右面)에서 보사(補寫)하였다.


♠ 진천 이영남 장군 묘소(鎭川 李英男 將軍 墓所)

2008년08월01일“진천 이영남장군 묘소”(鎭川李英男將軍墓所)가 충청북도 지정문화재(忠淸北道 指定文化財, 記念物第 144號)로 지정되었다.
○李英男(1563~1598) 將軍은 鎭川郡璣田里에서 태어난 朝鮮中期의 武臣으로 宣祖17年(1584)에 別試武科丙科에 及第하여 선조 25년(1592) 栗浦權管을 시작으로 壬辰倭亂때 元均의 幕下將帥로써 所非浦權管, 江界府判官등을 歷任하였다.
慶尙右水使元均이 倭軍에 의해 東萊城이 陷落된 후 도망가려 하자 全羅左水使 李舜臣에게 援兵을 청하여 聯合艦隊를 결성하게 되었고, 그 후 玉浦·泗川浦海戰, 閑山大捷등 수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宣祖31년(1598)에 加里浦僉使로 李舜臣將軍과 함께 露粱海戰에서 殉國하였다. 장군의 奴僕이 屍身을 收拾하여 故鄕인 鎭川 璣田里에 묻었으며, 선조 38년(1605)에 折衝將軍宣武原從一等公臣으로 錄勳되었다.

○墓所는 圓形의 封墳으로 직경 약 600㎝, 높이 약 240㎝로써 둘례를 十二支神像의 護石으로 조성하였다.
墓所앞쪽에 床石 및 階石, 정면 左·右側으로는 文人石과 望柱石이 각각 1기씩 있으며, 右側에 李英男 將軍 事蹟碑가 1983년에 세워졌다. 이 石物들의 狀態는 良好하나 近來에 建立·造成된 것이다. 左側으로 말 무덤 <愛馬塚>이 자리하고 있다.
李英男將軍墓所上段으로는 將軍의 父母 <李嗣宗, 廣州陳氏> 墓所 <雙墳> 각 1기 및 墓碑와 祖父 <李克仁>의 墓所및 墓碑1기가 위치하고 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장군에 대하여 1차 자료를 중심으로 재조명한 결과 『萬曆十二年甲申 秋別試文武榜目』을 통하여 장군의 생몰년 및 양친 관련 사항을 바로 잡았고 『加里浦僉使先生案』 그리고 宣武原從功臣錄券의 구체적인 분석과 자료 비판을 통해 진천 출신의 가리포첨사 이영남 장군과 관련된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李英男 將軍은 朝鮮中期의 武臣으로 壬辰倭亂때 수많은 海戰에서 활약하여 國家의 위태로움을 구하신 將帥이다.
그러나 당시 활약한 인물이 同名異人으로 後孫門中에서 서로의 활동내용을 혼재하여 紀錄하게 되었다. 이에 이영남 장군의 정확한 考證을 하게 되었으며, 露粱海戰에서 加里浦僉使로 殉國한 분이 本貫陽城, 鎭川出身이영남으로 硏究檢討되었다.
비록 李英男將軍墓所가 朝鮮時代墓所의 一般的形態로 最近에 새로 造成하였으나, 朝鮮中期最大의 國難이었던 壬辰倭亂당시 수많은 海戰을 통해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한 將軍의 偉業을 기리기 위하여 지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