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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의 역사 > 유적/유물 > 유물

◆ 부마공(駙馬公) 이영주(李英柱)·순정공주(順正公主)의 백자유물 및 관

  이 유물은 1984년 5월 19일~5월 21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신월리 산20 구 부마공 묘소에서 평택 시조묘역으로 이장을 위하여 발굴시 나온 것으로, 亞자 표시가 있는 순정공주의 목관 1점, 자 표시의 목관(木冠) 2점, 명기 24점(백자병 6점, 백자술병 1점, 백자합 1점, 백자접시 8점, 백자완 8점)이다. 이 유물은 1985년 5월 24일 충남 아산시 권곡동 403 온양민속박물관에 일건서류와 함께 영구보존을 위하여 위임보관했으며, 제1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 정절공(靖節公) 이옥(李沃)의 유품

  이 유품은 2001년 4월 1일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구 군영리) 민통선 안 양천허씨 세장산에서 그동안 실전했던 공의 묘를 592년만에 심멱, 포천으로 이장을 위하여 발굴할 때 나온 것으로, 고려자기 대접·접시·토기술병·놋식기 등 5점이다. 감정결과 고려말 또는 조선조 초기의 자기로 현재 서울 마장동 대종회관에 전시돼 있다.


◆ 문질공(文質公) 이예(李芮) 친필(親筆)

- 소재지: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 천리대 '몽유도원도'에 부친 찬시
- 사적개요(事蹟槪要)
  
  이 유필은 문질공(文質公) 이예(李芮)의 친필이다. 이예 [1419년(세종 1)~1480 (성종 11)]는 양성이씨(陽城李氏) 11세로 자는 가성(可成)이고 호는 눌재(訥齋)이다. 조선조 세종~성종 등 6조에 걸친 문신·문장가이다. 1438년 진사가 되고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군기시직장을 거쳐 1443년 집현전 박사가 되고 1445년 부교리로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했다. 부수찬을 거쳐 1447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문종 때 세종실록 찬술, 고려사절요 찬술에 참여하고 1455년 집의 판사재감사, 1457년 판봉상시사, 1459년 첨지중추원사 공조·호조참의, 1461년 첨지중추부사, 이조·형조참의가 되고 이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6년 발영시에 2등으로 등준시에 3등으로 급제하고 동지중추부사에 보직되고 공조·형조의 참판을 역임한 후 1471년 황해도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어 이듬해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개성부유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상으로 비단을 하사받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1476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판서로 재직 중 부녀재가금지가부론(婦女再嫁禁止可否論)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자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부양자가 없거나 부모나 존장자가 정상을 불쌍히 여겨 재가시킨 자는 이를 허락받고 재가한 자의 자손을 벼슬에 등용하지 말 것을 주장하여 이 안이 채택되어 조선왕조의 기본방침이 되었다. 1480년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원종공신2등으로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부친 찬시가 있다.


◆ 문간공(文簡公) 이승소(李承召) 글씨

  - 소재지:충북 충주시 이류면 매현리 536 청간사 소장

甲戌夏學易齋
蓋聞聖王之於天下也爲之君以牧之爲之師以敎之是故修六府以厚其生敷五敎以淑其心生不厚則奚於禮義心不淑則胥入於禽獸矣此聖王所以不得不敷敎於庶且富之後也 承召

  갑술년(甲戌年) 여름 학이재(學易齋)에서
  내 듣기로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림에는 통치자인 임금으로서는 백성을 잘 먹여 살리고, 가르치는 스승으로서는 백성을 잘 교화하여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엮어서 다스린다고 하였으니, 때문에 육부(六府)를 잘 이끌어 백성의 생활을 풍후하게 하고, 五倫의 가르침을 널리 펴서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해야 하는 것이다.
  삶이 풍부하지 못하면 어느 여가에 예의(禮義)를 따지고 갖출 것이며, 마음이 맑지 않으면 모두가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니,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림에 백성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넉넉해진 뒤에 가르침을 베풀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 군수(郡守) 이언양(李彦讓)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소재지: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림공원
  - 사적개요(事蹟槪要)
  
  이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는 함양군 상림공원(上林公園)에 세워진 것으로 능성(綾城), 강진(康津), 함양(咸陽) 세 고을에서 선정을 펼친 군수 이언양(李彦讓)의 청덕을 기리는 비(碑)이다.
  이언양은 본관이 양성(陽城)으로 1531년(중종 26)에 출생하여 1567년(명종 22)에 문과 급제하였으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능성현령(綾城縣令)을 지내고 1584년(선조 17)에 조산대부(朝散大夫)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냈다.
  그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으로 또 지덕이 겸비한 학자로 1585년(선조 18)에 세상을 떠났다.
  함양(咸陽)군수 시절 청덕과 선정을 베풀어 이를 기리는 선정비를 선조19년(1586)에 세웠고, 철종5년(1854) 중수하였으며, 이 중수비 앞에 그 내용을 현대문으로 새긴 와비를 설치했다.


◆ 군수(郡守) 이언양(李彦讓)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소재지: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능주향교
  - 사적개요(事蹟槪要)
  
  이 영세불망비는 능성(綾城) 현 화순·강진(康津)·함양(咸陽)등 세 고을의 군수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푼 이언양(李彦讓)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능주군민(綾州郡民)이 세웠다. 이언양은 1531년(중종 26)에 출생하여 1585년(선조 18)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양성이씨(陽城李氏) 13세로 156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1579년(선조 12) 능성현령(綾城縣令) 봉열대부(奉烈大夫)·강진현령을 역임하고 1584년에 함양군수가 되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으로 그는 항상 정치를 함에 있어 학문을 일으키는데 주력하였으며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정도를 따랐다. 그렇게 하여 결과는 유학이 생활화 되고 크게 번창하니 백성들이 입을 모아 이르기를 대단히 현명한 분이라고 모두 감탄하였다.(政先興學 治以其道 儒化蔚兮 民曰賢哉라 刻字됨)
  향사는 음력 10월 15일 전남 나주 영산포 삼영동에서 봉사한다.


◆ 예수 초상 그린 순교자 이희영(李喜英)의 그림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 606~608면에는 순조 때 화가로서 옥사한 양성인(陽城人)인 이희영(李喜英)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 족보에도 실려 있는 바와 같이 한 폭은 “견도(犬圖)” 묵화로 세로 32cm, 가로 28cm로 1795년 작 김량선(金良善) 소장으로 정세 치밀한 사실적인 소묘풍의 작품이며, 또 한 폭은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담채로 세로 23.6cm 가로 30.4cm 홍성하(洪性夏) 소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화(聖畵)를 그리다가 잡혀 순교한 초기 천주교인 이희영(李喜英:루카스)의 그림 한 폭이 뒤늦게 발견되어 천주교계와 미술사학계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희영(李喜英)의 별호인 추찬(秋餐)이란 낙관이 선명한 세로 105cm, 가로 32cm의 채색 견본(絹本)의 “쌍견도(雙犬圖)”는 작가가 천주교 순교자라는 것 이외에도 서양화 기법의 한국 전래를 가늠하는 사료적 가치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고목 아래 두 마리의 개가 있는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맹견도(猛犬圖)의 화법과도 흡사해 작자 미상인 이 맹견도 역시 이희영(李喜英)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그러나 맹견도(猛犬圖)는 단원(檀園)의 작품으로까지 평가할 정도로 명작이며, 음영(陰影) 표현이나 구도, 설채법이 매우 이질적인 서구회화 기법을 보여 큰 관심을 모아 왔다. 최(崔)관장은 “이 맹견도가 북경(北京) 왕래에서 서양화 기법을 익힌 천주교계 어느 화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 맹견도와 흡사한 쌍견도는 이원기(李元基)씨(전 월간문화재 발행인)가 일본에서 일본 골동품과 교환하여 되찾아온 것으로 세필로 개의 털을 정교하게 그린 것이 맹견도의 기법과 같다.
  쌍견도의 작자인 이희영(李喜英)은 “서화의 절재(絶才)”라고 순조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순조실록, 진휘속고(震彙續考), 서화징(書畵徵) 등은 “이희영(李喜英)의 호가 추찬(秋餐)이며 양성인(陽城人)으로 순조 원년(1801년) 신유에 서교(천주교)로 지목되어 옥사했다”고 인적사항을 밝히고 “글씨와 그림의 재주가 절등했다”고 그 기량을 평가하고 있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은 “이희영(李喜英)이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순조 원년 신유년 봄에 서교의 옥사가 일어나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처형됐다. 그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서학을 배우고, 예수상 3본을 그려 황사영(黃嗣永)에게 보낸 것이 탄로되어 자복한 것이다. 그 조카 현(鉉)도 서교로 형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희영(李喜英)은 예수그림을 그리다가 옥사한 순교자인 셈이다. 기록에는 그가 그린 예수그림이 있으나 실제로는 전하는 작품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숭전대(崇田大) 박물관에 있는 소묘풍인 “견도”가 이희영(李喜英)의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천주교는 교회창립 선조들의 시복 시성을 위해 재조사하여 제1차로 대상 순교자 98위를 새로 선정 발표했다. 즉 새로 추가된 시복 심사대상자에는 성화를 그리다가 순교한 이희영(李喜英)을 비롯, 이벽(李檗),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을 포함 모두 98위로 1802년 이전에 순교한 이들이다.
  또한 한국 교회사 연구소[소장 최석우(崔奭祐) 신부]에서는 1985년 2월 20일 “한국 카톨릭 대사전”을 발간하였는 바, 한국 천주교 200년의 역사와 전통을 항목별로 정리, 100여명의 사제 전문가들을 필진으로 5년여에 걸친 편찬 작업 끝에 완성하여 처음으로 공개하는 사진 자료로 수록해놓고 있다. 따라서 960면, 961면에 이희영(李喜英)과 조카 이현(李鉉)의 인적사항이 각각 실려있고, 또한 부록 154면에도 실려놓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희영(李喜英)은 1801년 5월 10일(음 3월 29일), 이현(李鉉)은 동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신 것이다.
  (1985. 12. 15일자, 양성이씨 종보 창간호 보도)


◆ 의병장 이능권(李能權)의 피체 당시 모습

  이 사진은 일본 노동경제사에서 1987. 8. 15 발행하고 신기수(辛基秀)가 편저 (1875~1945)한 영상이 말하는 '일한병합(日韓倂合)'사(史)에 실려 있는 것으로 우로부터 고이께(小池)순사, 유(兪)부장, 미스노(水野)부장, 손(孫)순사 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