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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李 荃):1526(중종21) ~ 1602(선조35).

  무신.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3세손. 사도진(蛇渡鎭) 수군첨사(水軍僉使) 윤종(潤終)의 아들. 내자시봉사(內資寺 奉事)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기 몸이 늙어 병석에 있으면서도 아들 원남(元男) 의남(儀男) 지남(智男)을 충무공(忠武公) 막하에 보내놓고 집안의 심부름하는 가동(家僮)까지 동원 군량을 보냈다. 한편 늙은 몸을 이끌고 해전에도 출전 1592년 6월 7일 당항포(唐項浦)해전 다음날 천성(天城) 가덕(加德)으로 선장진무(船將鎭撫)로 나아가 토병(土兵) 오수(吳水) 등과 왜인의 머리 두개를 베어 가지고 급히 돌아왔는데 가덕 앞바다에서 왜인 3명을 발견하여 머리를 베고 하나는 경상우수사 군관(軍官)에게 뺐겼다는 적정보고로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즉시 출동 영등포(永登浦) 앞바다에서 율포(栗浦) 앞바다까지 추격, 왜선 4척을 격파 소각, 3척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595년(선조28) 2월 25일 장계를 가지고 조정에 갔다가 조보(朝報)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편지를 가져왔고 그 해 7월 4일 충무공에게 노만들 나무를 가져다 바치기도 하고, 이듬 해 7월 26일 체찰사(體察使)에게서 표험(標驗) 3벌을 받아가지고 오는 등 시종 후방에서 충무공을 도왔다. 1605년 주부(主簿)로 선무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 2등(40정우 9행)으로 녹훈되어 판관(判官)에 가자(加資)되고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랐다. 순천 성모재에 배향.(1-73)

 

◆ 이언함(李彦諴):1538(중종33) ~ 1593(선조26).

  무신. 자는 경신(景信).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3세손. 훈도(訓導) 임(琳)의 아들. 김하서(金河西)의 문인. 1572년(선조5) 무과에 급제. 1589년(선조22) 비변사에서의 무신 채용시 정언신(鄭彦信)은 공을 이순신 (李舜臣)과 함께 추천하였다. 예천(醴泉) 거제(巨濟) 결성(結城) 울산(蔚山)군수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을 맞아 왜적과 싸우다가 이듬 해 6월 17일 용만(龍灣)에서 순국했다. 1605년 군수(郡守)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62정우 6행)에 녹훈되어 부사(府使)로 가자(加資)되었다.(1-207)

 

◆ 이정영(李廷英):1545(인종1) ~ 1627(인조5)

  문신. 자는 사선(士先). 호는 회헌(晦軒).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3세손. 진사(進士) 백근(百根)의 아들. 1589년 (선조 22)에 생원시에 합격. 임진왜란 전해에 친상을 당했는데, 임란이 터지자 진천(鎭川)의 향인이 의병장(義兵將)을 삼고자 했고 신잡(申磼) 유근(柳根) 현감 홍인지(洪仁祉)가 맹장(盟將)으로 삼으니 부득이 상중에도 묵최(墨衰)를 입고 종군, 각 군·현에 격문을 보내어 의려(義旅)를 크게 떨치니 공이 의병장이 되었음을 듣고 수많은 의병과 군량이 모아졌다. 곧바로 충주(忠州) 달천(達川)으로 달려가 신립(申砬) 휘하에서 역전 분투하였으나 패주하고 말았다. 이후 호가(扈駕)에 참여했으며 또한 1596년(선조29) 7월6일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데도 참전했다. 이후 부장(副將) 김수생(金壽生)에게 대장직을 맡기고 돌아와 정주학(程朱學)을 강의하여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제자양성에 힘썼다. 1600년(선조33)에 정릉참봉(靖陵叅奉)이 되고  1603년(선조36) 한성참군(漢城叅軍), 1605년 봉사(奉事)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96정자 10행),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3등(38정우 8행), 봉사(奉事)로 청난원종공신(淸難原從功臣) 3등(8정우 4행)으로 녹훈되고 1608년(선조41)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 이듬해 음죽현감(陰竹縣監)으로 있으면서 선정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문장과 효행이 세상에 명세(鳴世)하였다.(1-283)

 

◆ 이영남(李英男):1566(명종21) ~ 1598(선조31)

  무신. 자는 사수(士秀).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3세손. 부사직(副司直) 사종(嗣宗)의 아들. 1566년 2월 13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에서 광주 진씨(廣州陳氏)와의 사이에 3대 독자로 출생. 12세 소년 시절에 부모상을 동시에 당하여  3년 시묘까지 한 효자. 18세에 용마(龍馬)를 얻어 무예를 배우기 시작, 마두(馬頭:말머리)부락의 전설까지 있다. 19세 때인 1584년(선조17)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승진. 1589년(선조22) 태안군수(泰安郡守)로 발령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으로 전임. 1592년(선조25) 임란시에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휘하 율포만호(栗浦萬戶)로 있었다. 임란이 터지자 적세의 거대함을 보고 원균은 곤양(昆陽) 해구에서 잠시 대피하고 있을 때에 장군은 원균을 간하여 소식지간(素識之間)이며 인족(姻族)인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을 5·6차례 찾아가 청군(請軍)하였다. 이후 5월7일부터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으로 역사적인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등 해전에 협선을 타고 참전, 5월29일 사천(泗川)해전, 6월 2일 당포(唐浦)해전 등에서는 왜장의 배에서 울산 사가집 여종 억대(億代)와 거제 아녀 모리(毛利) 등을 빼앗아 충무공의 적정 탐지에 도움을 주었다. 6월5일 당항포(唐項浦)해전, 6월 7일 율포(栗浦)해전 참전시는 소선을 타고 적선에 사격하여 들어가서 적의 머리 둘을 베고 왜선 1척을 불살랐다. 또한 7월 8일 한산도(閑山島)해전, 7월 10일 안골포(安骨浦)해전, 8월 29일 장림포(長林浦)해전, 9월 1일 부산포(釜山浦)해전에 참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593년(선조26) 2월 10일~4월 3일 웅포(熊浦)해전에 참전, 3월 2일 왜적 수십명을 격살하고 빼앗은 칼 4개중 작은 칼 1개를 이순신(李舜信)에게 바쳤다. 5월 7일~7월 14일 이순신의 거제도 수색작전에 참전. 7윌 19일 한산도(閑山島) 설진(設鎭) 후 이순신에게 진주(晋州)·하동(河東)·사천(泗川)·고성(固城) 등지의 적들이 도망갔음을 보고, 1594년(선조27) 3월 4일 당항포(唐項浦)해전에 삼도명장(三道名將) 31명 중에 선발되어 좌선봉장 훈련판관(訓練判官) 겸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으로 참전, 왜대선 2척을 불살라 없앴다. 3월 21일 三道 수군의 현지 과거(科擧)에 녹명관(錄名官)이 되어 과거 사무를 총괄했다. 8월 14일 춘원포(春院浦)의 적선을 급습, 우리나라 사람 남녀 15명과 적선을 빼앗았고, 9월 27일~10월 8일 장문포(長門浦)해전에도 참전했다. 1595년(선조28) 5월 임란 후 만 3년간의 임기 만료로 태안(泰安)군수로 부임, 7월에 강개부판관(江界副判官)으로 전임하여 선정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차. 1596년(선조29) 12월 제74대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부임. 1597년(선조30) 3월 20일 포로 교환업무에서 인도주의를 발휘했다. 5월 22일 새 통제사가 된 원균(元均)은 이순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기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장군을 배척, 모략 상계로 파직되었다. 1597년 8월 3일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원균이 패사한 후 복직된 이순신의 조방장으로 함대를 재편성. 9월 16일 명량(鳴粱)해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9월 21일 육전에도 조방장으로 참전, 낙동강까지 패적을 추격하기도 했다. 1598년(선조31) 3월 제56대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겸 조방장(助防將)에 임명되어 고금도(古今島)에 기지를 두고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발행. 군량미를 비축, 소금을 굽고 구리와 쇠로 각종 포를 만들고 화약을 넣은 종이 주머니를 만들고, 조주(漕舟)에 익숙한 수군을 완도(莞島) 각진에서 소집 훈련시켜 1만여명의 대함대를 만들었다. 장군은 충무공과는 부자(父子)간의 정의로 남다른 신임을 받아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69회나 기록돼 있다. 1598년 11월 19일 최후의 노량진해전에서 남해 등지의 왜수군 5백척을 맞아 새벽 2시부터의 결전시 이순신이 전사함에 통곡비분 강개하여 의(義)를 위하여 혼자 살아남지 않겠다고 하며 순국할 것을 결심하고 남은 함대를 이끌고 독전 총공격을 하다가 마침내 이마에 탄환을 맞고 33세로 전사했다. 줄곧 수행하여 참전한 노복(奴僕) 일학(日鶴)이 영구를 모시고 돌아와 이듬해 봄 1599년에 고향인 충북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 산88의 4 갈현산(葛峴山) 선영하에 안장했으며, 소년시절 무예를 닦을 때의 애마인 용마총(龍馬塚)도 묘 옆에 있다. 때에 슬하에는 1596년 잠시 휴관(休官)시 나주정씨(羅州丁氏)와의 사이에 낳은 외아들 4세의 진명(震明)이 있었다. 1605년 (선조38)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 3정 4행에 녹훈되고 병조참의(兵曹叅議)로 증직. 1621년(광해군 13)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추증, 1720년(숙종46)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다시 추증되었다. 충무공의 최후 진터였던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산58 충무사(忠武祠)에는 1959년에 위패를, 1985년에는 이규선(李奎鮮) 화백 그림의 영정을 충무공과 함께 배향했다. 한편 1960년 진천읍내 삼수 초등학교 앞에는 현충비(顯忠碑), 1983년 장군묘역에는 사적비(史蹟碑)가 세워졌다. 또한 진천문화원에서는 「이영남 장군 전기(李英男 將軍 傳記)」를 1984년에 발간했다.(1-279)

 

◆ 이지남(李智男):?

  무신. 자는 정숙(貞叔).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가정대부(嘉靖大夫) 행주부(行主簿) 전(荃)의 아들. 임진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형 원남(元男) 의남(儀男)과 함께 의기 격발하여 의병을 모아 충무공 막하로 들어가 정운(鄭運)과 동심합력(同心合力)하였고 그 후 군량미 1백여석을 싣고 선조(宣祖)의 행재소에 가서 호위 군무로 공을 세웠고 돌아와서는 이순신(李舜臣)의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난중일기에는 1596년 윤8월 17일 「이지남들이 보러 와서 수군 향상책을 논한 바 있는」기록이 있다. 1605년 허통(許通)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21정좌 5행)으로 녹훈되고, 1606년(선조39)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된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올랐다. 순천 성모재에 배향.(1-73)

 

◆ 이  벽(李  璧):1546(명종1년) ~ ?

  문신.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순령(舜齡)의 아들. 율곡문인(栗谷門人). 임진란에 해주(海州)에서 동문인인 정랑(正郞) 박여룡(朴汝龍) 좌랑(佐郞) 조광현(趙光鉉)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관서(關西)로 들어가 의주(義州)까지 호가(扈駕)하여 해주로 돌아왔다. 벼슬은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에 올랐다. 1605년 참봉(叅奉)으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7정우 7행)에 녹훈되어 직장(直長)으로 가자(加資)되었다.(1-105)

 

◆ 이  진(李  軫):1557(명종12) ~ 1616(광해군8)

  문신. 자는 경임(景任), 호는 서포(西浦).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순령(舜齡)의 아들. 율곡문인(栗谷門人). 1582년(선조15)에 진사, 1588년(선조21)에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문인과 직장(直長)으로 해주(海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가(扈駕)하였고 1593년 12월 이후 좌랑(佐郞)으로서 중국 등의 군량미를 평안도에서 서울 등지로 배로 수송하는 서해의 책임자로 활약했다. 1595년(선조28) 6월 11일 유성룡(柳成龍)은 재주가 수령이 될만하다고 왕에게 추천, 1597년(선조30) 10월 정유재란 때는 정읍현감(井邑縣監)으로 활약, 1601년(선조34)에 공로로 1자급 승진하고 아마 1필을 하사받았다. 1604년(선조37) 5월 16일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고 1605년 부사(府使)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46정우 4행), 선산부사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4정좌 6행)으로 녹훈되고,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올랐다.(1-107)

 

◆ 이  영(李  英):1559(명종14) ~ 1616(광해군8)

  무신. 자는 자실(子實).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계충(繼忠)의 아들. 5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11세 때 어머니의 위환에 단지(斷指)하여 치료한 효자. 1583년(선조16)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산별장(平山別將) 부장(部將)으로 140여명을 이끌고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가(扈駕)에도 참여하고 출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1596년(선조29)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인 화왕산성(火旺山城)에 현풍·영산·청도의 수령과 함께 들어가 성을 쌓고 굳게 지켰다. 1597년(선조30) 4월 28일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고 정유재란 때는 9월에 수하의 관군과 의병으로 출전 화왕산성의 수성장(守城將)으로 부산의 왜적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많은 군대가 포위했으나 백성과 함께 동요하지 않고 직접 나서서 돌격하고 야간공격 복병 등으로 왜군을 격파 57명을 베고 2백명을 유인했으며, 백성들을 무휼하고 편안히 살게 하여 상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598년(선조31) 4월 29일 유성룡은 공의 인품됨을 품의 당상으로 승진 발탁되었다. 1601년(선조34) 4월 25일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로 포로의 귀환을 보고. 1603년(선조36) 3월 24일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왜의 강화 흉계에 관하여 장계를 올렸고 1604년(선조37) 6월 2일 전라병사(全羅兵使), 이 해 윤9월 3일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었다. 1605년 행목사(行牧使)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7정우 6행)에 녹훈되었다. 1610년(광해군2) 종성부사(鍾城府使), 1613년 함경북도병사(咸鏡北道兵使), 1615년 10월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오르고 이듬 해 상으로 숙마 1필을 하사받았으며 1616년(광해군8) 2월 12일 통영(統營) 임소에서 병졸했다. 효행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청백위망(淸白威望)으로 이름이 높았고 선정을 베풀어 이르는 곳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섰다.)(1-98)

 

◆ 이충신(李忠信):? ~ 1592(선조25)

  무신.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팽년(彭年)의 아들. 절의록(節義錄)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담략이 있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8년(선조21) 사헌부감찰을 거쳐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간성군수(杆城郡守)로 의병을 규합 간성으로부터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신립(申砬),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낸 김여물(金汝岉)을 좇아 충주(忠州) 달천(達川)으로 달려가 싸웠으나 마침내 패전하는 가운데도 앞으로 나아가 왜적을 사살, 화살이 다하매 주장 신립과 함께 탄금대(彈琴臺) 열두대의 물에 뛰어들어 순국했다. 1605년 주부(主簿)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99정좌 7행)에 녹훈되어 판관(判官)으로 가자(加資)되었다.(1-153)

 

◆ 이경신(李敬信):? ~ 1598(선조31)

  무신.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팽년(彭年)의 아들. 충신(忠信)의 아우. 무과에 급제, 1592년 전라병사 산하 군관(軍官)을 거쳐 이순신 휘하에서는 훈련판관(訓練判官) 및 전선 수리를 전담하고 이후 강계판관(江界判官)이 되었다. 1598년 노량해전에 참전 적선을 분익(焚溺)하고 많은 왜적을 격살하는 등 전공을 세우고 순국했다. 난중일기 임진 정월 1일에 기록되고 부솔(副率) 양응수(楊應秀)가 행장을 지었다. 1605년 주부(主簿)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40정우7행)에 녹훈되어 판관(判官)으로 가자(加資)되었다.(1-154)

 

◆ 이  진(李  振):? ~ 1598(선조31)

  자는 기보(起甫).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문하시중(門下侍中) 인부(仁富)의 7대손. 과의교위(果毅校尉) 충백(忠伯)의 아들.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를 지내다. 1597년 정유재란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노량전에 계방(季方) 이추(李推)와 같이 참전, 총에 맞아 순국했다. 이에 타고 다니던 말이 공 의 적삼을 물고 돌아와 전의(全義) 대완산(大完山) 고조부 첨절제사공 이희년(李希年) 산소 위쪽에 내려 놓고 말도 죽으니 그 자리에 초혼장을 모셨다. 1646년 인조24년때 이러한 충절로 승지(承旨)로 추증됐다.(1-163)

 

◆ 이  추(李  推):? ~ 1598(선조31)

  자는 경서(景恕).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문하시중(門下侍中) 인부(仁富)의 7대손. 과의교위(果毅校尉) 충백(忠伯)의 아들. 1597년 정유재란시 국가의 위급함을 통탄하고 왜적의 세력이 크게 떨침을 분하게 여겨 백형(伯兄) 봉사공(奉事公) 이진(李振)과 함께 노량전에 참전, 백형이 전사함을 보고 앞장서 역전(力戰)하다 순절하여 전의(全義) 대완산(大完山') 고조부 첨절제사공(僉節制使公) 이희년(李希年) 산소 좌편 언덕에 초혼장을 모셨다. 1646년 인조24년 이 충절로 감참(監察)로 추증됐다.(1-164)

 

◆ 이대명(李大鳴):생졸미상

  자는 문원(聞遠)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문하시중(門下侍中) 인부(仁富)의 7대손. 창신교위(彰信校尉) 신백(信伯)의 아들. 임진왜란에 포수로 참전 장사랑(將仕郞)에 오르다. 1597년(선조30) 정유(丁酉) 3월 12일 형조판서 김명원(金命元)에게 혐의받은 조한(趙漢)을 신구하고 인의를 몸소 궁행하여 왕명으로 훈련도감에서 후대받았고, 군사기밀에 능통하고 오래 머문 지방에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또한 난중에도 학문에 정심. 주역(周易)과 소미통감(小微通鑑)을 이덕형(李德馨)에게서 구 하는 등 문필로서 선비의 도를 지켜나갔다. 공은 1618년(광해10) 무오(戊午)에 광해혼조에도 70여세 노구로 식년시 무과에 합격. 이같은 참전유공, 학덕. 장수로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嘉善大夫 僉知中樞府事)로 추증됐다.(1-166)

 

◆ 이  설(李  渫):? ~ 1598(선조31)

  무신.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증호조참의(贈戶曹叅議) 언간(彦諫)의 아들. 1579년(선조12) 무과에 급제, 봉사(奉事)가 되고 임란 때는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나대용(羅大用)과 같이 거북선을 만들었고 유진장(留鎭將)으로도 있었다. 이후 군관으로 각 해전에 참전, 1592년 5월 7일 합포(合浦) 해전시 변존서(卞存緖)·송희립(宋希立)·김효성(金孝誠)과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 다음날 적진포(赤珍浦) 해전시는 송희립과 함께 왜대선 2척을 격파 소각, 5월 29일 사천(泗川) 해전시는 이순신 나대용과 함께 부상까지 당했다. 1593년 2월 웅포(熊浦)해전에서 좌별도장(左別都將)으로 귀선장(龜船將)인 좌돌격장(左突擊將) 이언양(李彦良)과 참전, 수백명이 타고 있는 왜선 3척을 격추중 금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고 큰 소리로 외치며 노를 재촉하는 적장을 피령전(皮翎箭)으로 쏘아 죽이고 남은 적도 모두 쏘아 죽였다. 1594년 3월 5일 당항포(唐項浦) 해전시는 훈련판관(訓練判官)으로 출전, 배경남(裵慶男)과 함께 왜대선 1척을 격파 소각. 이해 5월 24일에는 우별도장(右別都將)으로 명(明)나라 관원 양보(陽甫)를 마중. 1595년 11월 21일 포폄(褒貶)하는 장계를 가지고 가는 등 충무공을 도와 많은 활약을 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는 만호(萬戶)로 참전 대승을 거두고 충무공과 함께 순국했다. 1605년 부정(副正)으로 선무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 1등(4정우5행)으로 녹훈되고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로 추증되었다.(1-210)

 

◆ 이덕남(李德男):? 무신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5세손. 명종조(明宗朝) 원종공신(原從功臣) 준(遵)의 아들. 임진왜란에 참전. 1605년 주부(主簿)로 선무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 2등(32정우11행)으로 녹훈되고, 공신가자(功臣加資) 판관(判官)이 되었다.(1-168)
※이상 15위 보령 호국사 배향

 

◆ 이광익(李光翼):1520 ~ 1592

자 공좌(公佐). 호 애일당(愛日堂). 시조 상주국공의 13세손. 사복시정 함(瑊)의 아들. 김하서(金河西)의 문인. 효행이 두드러져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사하다. 임진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함에 조실부모하여 외가에서 자란 생질 김천일(金千鎰), 종제 광주(光宙)를 불러 국난에 순하도록 격려하고 또 격문을 양산숙(梁山璹)·고경명(高敬命) 등에게 보내어 선등(先登) 하도록 권고하고는 행재소로 가다가 공주에서 사망하다. 나주읍지·절의록에 오르고 나주 정렬사(旌烈祠)에 배향.(1-188)

 

◆ 이광주(李光宙):1540 ~ 1593

  자 천중(天中). 시조 상주국공의 13세손. 예빈시별좌 당(瑭)의 아들. 김하서(金河西)의 문인. 1591년 생원시에 합격.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격문을 띄우고 강화로 들어가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를 배수하고 분전하다가 1593년 7월 순절하여 초혼반장했다. 사적이 나주지에 실리다.(1-194)

 

◆ 이윤남(李胤男):생몰년 미상

  시조 상주국공의 13세손. 승사랑 언관(彦觀)의 아들. 연산(連山)현감. 1627년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횡성에서 중영장으로 평정. 소무공신(昭武功臣) 3등에 서록되다.(1-235)

 

◆ 이사선(李師善):1538 ~ ?

  자 선원(善元). 호 행정(杏亭). 시조 상주국공의 13세손. 훈련원 판관 단(坦)의 아들. 율곡문인. 건원릉 참봉. 남대장령(南臺掌令), 임란때 조헌(趙憲)과 함께 창의, 동국문헌록에 실리고 문집 1권이 있다.(1-294)

 

◆ 이원남(李元男):생몰년 미상

  시조 상주국공의 14세손. 내자시봉사 전(荃)의 아들. 만호. 첨사. 임진란에 의사들을 모아 아우 의남(儀男)·지남(智男)과 함께 배를 타고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해전에 큰 공을 세우다. 순천 성모재 배향.(1-73)

 

◆ 이의남(李儀男):생몰년 미상

  시조 상주국공의 14세손. 내자시봉사 전(荃)의 아들. 무과급제, 선전관. 임진란에 집안 하인들과 의사 백여명을 이끌고 군량미 3백석을 싣고 충무공 휘하로 들어가 많은 전공을 세우다. 선조가 의주로 간 것을 비분히 여겨 형 원남(元男)과 정사준(鄭思竣) 등과 함께 의곡을 모아 배에 싣고 행재소에 바쳤다. 이 충절로 1606년 훈련원봉사에 임명된다. 순천 성모재 배향.(1-73)

 

 

◆ 이성찬(李成燦):? ~ 1598

  시조 상주국공의 14세손. 애일당 광익(光翼)의 아들. 1594년 무과에 합격. 훈련원 훈장이 되고 충무공 이순신의 좌익장으로 여러번 승첩, 노량전에서 순국하여 초혼 반장을 하다. 영광읍지에 실리다.(1-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