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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광(李秀匡):고려 문종(1047~1083)

  문신. 양성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송(宋)에서 출생. 고려에 와서 문종조(文宗朝)에 벼슬을 하였다. 여러 차례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유겸전(剛柔兼全)의 외교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 선린관계를 맺은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제1등으로 책훈(策勳)되었고 채읍(采邑)으로 양성(陽城)을 하사받음으로 양성이란 본관을 얻게 되었다. 또한 출장입상(出將入相)하고 덕망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당(唐)나라 현종(玄宗)때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한 곽자의(郭子儀)에 비하였다. 송나라가 변란으로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왕명으로 원정하여 한달에 세 번 승첩(勝捷)을 거둠으로써 송나라에서 황제가 연회를 베풀어 친필로 “고려대신 이수광은 공관천하요, 명양후세하리라.”고 써주고 특진 금오위대장군 상주국 관내후 은청광록(特進金吾衛大將軍 上柱國 關內侯 銀靑光祿)의 직위를 받았고 고려에서 삼중대광 보국 양성군(三重大匡輔國陽城君)에 봉해졌다.
  유지(遺趾)가 양성구내(陽城九內)에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고 1838년(헌종 4) 후손 헌의(憲義) 등이 창의(倡議)하여 양성군 양성면 천덕산(天德山)에 설단(設壇)하였고 1848년(헌종 14) 다시 양성군 반곡면(盤谷面) 번판(蕃坂:평택시 죽백동 산43의 3)에 봉위(奉位)하였다. 묘역에 숭모재(崇慕齋)와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는 1983년에 세운 것으로 문학박사(文學博士) 이숭녕(李崇寧)이 짓고 26세손 원영(源永)이 쓰고 26세손 경한(慶漢)이 세웠다.(1-1)

 

-▶ 이수방(李守邦):?~1341

  고려 충숙왕, 충혜왕 때의 문신, 일명 나해(那海). 호는 석탄(石灘), 관직은 관정대부 도첨의평리 판밀직사사 상호군 양성군, 시조 상주국공의 6세손. 삼중대광 금오위대장군 첨의평리 개성윤 양성군 천(梴)의 아들.
  공은 풍채가 잘 생겼는데 마음도 그 외모와 같았다. 일찍이 원(元) 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영종(英宗) 황제가 그 풍의를 가상히 여겨 특히 예우하여 나해(那海)라는 이름을 주고 직성사인(直省舍人) 벼슬을 내렸으며, 환국하매 충숙왕이 융숭한 예우를 하였다. 1321년 역신 일당들이 충숙왕을 폐하고 심양왕 고(暠)를 영입코자 음모하고, 1322년 심양왕이 원나라에 가서 또 무고, 충숙왕이 원 영종에게 불려가 국왕인을 빼앗기고 5년동안 억류함에 공 등이 중서성(中書省)에 부당함과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올려 국왕인을 다시 찾아 1325년 왕을 받들어 귀국하였다. 이후 1327년에도 또 모략이 있었으나 간신을 물리치고 선위를 저지하였다. 1327년 공은 군부판서로 1등공신이 되었는데, 교지에 “과인이 5년간 원도(연경)에 있을 때, 간신이 왕위 찬탈 음모를 꾸몄으나 시종하는 신하들이 충정을 다하여 나를 보좌해 주었는 바, 그중에서도 이나해의 공이 제일 크므로 1등공신에 녹하고 아울러 부모처자에게도 작위를 내리노라.”하였다. 이때 1등공신 26인, 2등공신 54인이었다. 1341년 첨의평리인 공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병환으로 중도에서 졸하였다.(1-3)

 

-▶ 이수인(李守仁):생몰년 미상.

  고려. 문신. 시조 상주국공의 6세손. 삼중대광 금오위대장군 첨의평리 개성윤 양성군 천(梴)의 아들. 고려말 판사(判事)를 지냈으나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정희(鄭熙)·김진양(金震陽)·이종영(李鍾榮)과 함께 유배되었다.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중의 한사람으로 개성에 있는 표절사(表節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志: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의 옛지명) 부조현언지록(不朝峴言志錄)에 이수인(李守仁) 유원지(流遠地)로 나와 있다.(1-5)

 

-▶ 이춘부(李春富):?~1371

  고려 충정왕·공민왕 때의 문신. 관직은 충근절의벽상삼한 동덕찬화공신 특진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선부사 영효사관사 양성부원군 동북면도원수. 시조 상주국공의 7세손. 광정대부 도첨의평리 판밀직사사 상호군 양성군 수방(守邦)의 아들. 1349년 삼사좌윤·우대언. 1350년 밀직부사. 1356년 추밀원부사. 1358년 지추밀원사. 왜구를 막기 위해 방어사가 되고 서강병마사가 되다. 1359년 판추밀원사가 되고 홍두적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함에 서경윤으로 방어하다. 1360년 왜적이 남쪽에서 내륙으로 침범하매 동강도병마사로 막다. 1361년 홍두적이 재침입하여 개경이 함락, 전라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이를 평정, 이 공로로 수성보절공신 호를 받다. 1363년 첨의평리로 1등공신이 되다. 1365년 도첨의찬성사가 되고 1366년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에서 토지와 노비개혁의 송사를 처결하다. 1368년 도첨의시중이 되고 충근절의동덕찬화공신 호를 받다. 도첨의우시중이 되다. 1371년 신돈의 반역 모의가 탄로되어 처형되매, 사헌부에서 공이 국정 책임자로서 죄인을 다스리는데 철저하지 못했다는 끈질긴 요구로 왕의 윤허로 최후를 마치다.(1-8)

 

-▶ 이옥(李沃):?~1409

  고려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때의 문신. 시조 상주국공의 8세손. 고려 찬화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 양성부원군 춘부(春富)의 아들. 1371년 활을 잘 쏘아 공민왕에게서 안마를 하사받다. 1372년 공이 아버지에 연좌되어 몰수돼 강릉부의 관노가 되었는데 이때 강릉부, 영덕현, 덕원현에 왜구가 침입, 용감히 싸워 왜구를 격퇴, 왕은 안장 갖춘 말을 내리고 벼슬을 내려 부원을 풀어주다. 1387년 좌상시, 1390년 강릉도절제사가 되다. 조선이 개국되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1393년 원종공신, 1400년 조전절제사, 1405년 판한성부사, 1406년 검교참찬의정부사, 1409년 개성유후사유후에 이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건국후에도 벼슬을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志)에 있는 절제사이선생봉안문(節制使李先生奉安文)에 의하면 조선조에서는 퇴거(退居)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백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봉안(奉安)되었고, 개성에 있는 표절사(表節祠)에 배향(配享)되었다.(1-8)

 

-▶ 이빈(李贇):?~1388

  고려 우왕·창왕 때의 무신, 시조 상주국공의 8세손, 문하시중공 춘부(春富)의 아들, 1371년 7월, 아버지 시중공에 연좌되어 5형제가 함께 관노로 편예되어 각 주군에 예속되었으나 1372년 6월, 장형 정절공 옥(沃)이 강릉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큰 전공을 세우므로써 그 역을 면제받다. 1385년 무예도감사를 거처 1388년 진주목사로 재직중, 왜적이 청주·유성·낙안군·고흥·풍안 등에 대거 침입하고 또 진주를 침범하니 용전분투하다 순국했다. 증 병조판서.(1-27)

 

-▶ 이지실(李之實):생몰년 미상.

  조선 정종·태종·세종때의 문신. 시조 상주국공의 8세손, 삼중대광 문하시중 인부(仁富)의 아들. 1400년 개성에서의 방간(芳幹)의 난때 대장군으로 활약, 1401년 태종이 즉위하면서 람포진(藍浦鎭) 병마사가 되다. 1406년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경기좌우도 수군도절제사로 임명되어 전함을 수리하여 왜선을 추격하도록 유시를 받다. 이후 안주절제사를 거쳐 1407년 중군동지총제, 1408년 안주등처도병마사, 판안주목사, 1409년 강계도도병마사가 되다. 1411년 각 위(衛)에 절제사를 두면서 강계절제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개천도감(開川都監) 제조를 거쳐 상왕 정종비가 죽으니 국장도감제조가 되고 삼군·별시위·응양위의 절제사를 둘 때, 우일번(右一番) 절제사가 되다. 1413년 충청도병마도절제사로 단·견을 하사받고 충청도도절제사가 되다. 1417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 도안무사로 용성의 성자(城子)를 쌓기도 하였으나 군기(軍器)를 정련하지 않았다는 탄핵을 받기도 했다. 중군총제가 되고 1419년 공조판서가 되고 충청도도체찰사가 되고 황해도 연평곶에서의 왜선대치사건으로 황해도조전병마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대마도 정벌을 밤늦게까지 의논하다. 이종무(李從茂)가 삼군도체찰사가 되어 대마도 정벌때는 공은 우군도절제사로 좌군도절제사인 유습(柳濕)과 함께 병선 2백27척, 병력 1만6천6백16명이 65일 양식을 싣고 대마도에 상륙하다. 그후 공조판서인 공은 충청해도 조전절제사로 요해지에 머물면서 대마도로 돌아오는 왜적을 맞아 치다. 대마도 정벌후 말 한필을 하사받고 1420년 공조판서로 중국의 사신 원접사로 의주에 가 맞이하다. 1424년 과거 경주부윤 재직시의 군자전세(軍資田稅)의 과수납건으로 탄핵되고 광양으로 귀양가다. 1435년 임금이 직첩을 돌려주다.(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