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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양성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1040년대 고려 문종조(1046∼1083)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輔國) 벼슬과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지고 양성(陽城)의 관적(貫籍)을 받았다.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 문종조 때 벼슬을 하였으며, 누차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유겸전(剛柔兼全)한 인품과 상호이해와 슬기로운 설득과 무마의 외교로 동침야욕을 봉쇄하고 선린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라를 안연(晏然)하게 한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제일(第一)로 책훈되었다. 또한 출장입상(出將入相)하고 덕망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당나라의 곽자의(郭子儀)에 비유하였다.

   송나라가 고려에 구원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하여 한 달에 세 번 승첩을 거두매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고려대신(高麗大臣) 이수광(李秀匡)은 공관천하(功冠天下)요. 명양후세(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고 특진금오위대장군(特進金吾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의 작위를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영귀공자(榮貴公子)라 칭송하였다.

   양성(陽城)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이수광(李秀匡)이 정란공신으로 책훈되고, 양성을 채읍(采邑)으로 하사 받은 사패지지(賜牌之地)에서 연유 되었다. 시조의 유지(遺址)가 양성향교의 곁 이라고 하며, 묘소는 그 뒤쪽 몇 리쯤 떨어져 있었다고 전해 왔는데 표지(標識)가 없어 실전 했다. 양성(陽城)은 고구려 때 사복홀(沙伏忽), 신라 때 적성(赤城), 고려 초에 양성(陽城)으로 정한 지명으로써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과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일원에 있는 옛 지명이다.

   현재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산 43의 7의 유좌지원(酉坐之原)에 양성이씨 시조묘역을 1848년 헌종 14년 무신 시월에 시조 휘 수광(秀匡)의 단을 비롯하여 5세까지 설단 하였고1969년 6세 수인(守仁)의 단을 추가 설단 하였다.

   1984년5월21일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산 20 무갑산 능골에서 4세 부마공(駙馬公) 휘 영주(英柱), 배위 순정공주(順正公主), 계배위 정씨(鄭氏)의 묘소를 시조단하에 천묘하였으며, 2013년11월3일 묘소가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증영리에 모셔져 있는 6세 석탄공(石灘公) 휘 수방(守邦)의 단비(壇碑)를 추가설단 함으로써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시조묘역을 성역화 하고, 매년 음 10월 1일 세향을 받들고 있다.



“북풍이 울부짖고 눈보라치는 겨울날, 너희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리지나 않는지 걱정되어 한숨 지누나. 망령되게 좋지 못한 친구를 사귀면 끝내 이익 됨이 없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면 도리어 해를 입는 법. 색은 반드시 몸을 망치니 모름지기 삼가야 하고, 말은 자칫하면 자기를 해치기 쉬우니 깊이 생각 하여 말 할지어다. 우리가 할 일은 충효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충효를 몸소 실천하면 그 명예 자연히 온 나라에 알게 되리.”


   시조 상주국공(上柱國公) 6세손인 석탄공(휘 守邦)은 용의가 아름답고 마음이 그 용모와 같아 당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영종(英宗) 황제로부터 “나해(那海)”라는 이름과 직성사인(直省舍人)의 벼슬을 받고 귀국함에 고려 충숙왕(忠肅王)은 융숭한 예우를 하여 공정대부도첨의평리 판밀직사사 상호군에 오르게 했으며 또한 왕위 찬탈음모를 분쇄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석탄공은 네 아들이 모두 대현하여 장남 춘부(春富), 차남 인부(仁富), 3남 광부(光富)는 18, 19세에 과거 급제하여 모두 시중(侍中)이 되었으나 막내 원부(元富)만은 탈선하여 지내므로 어느 날 아침 막내아들의 침실에 들어가 잠자고 있는 머리맡에다 위와 같은 계자시를 써놓아 크게 깨닫게 하여 21세에 장원급제하고 상서(尙書)가 되게 하였으니 그 인자한 자손의 교육방식이 맹모 삼천지교에 버금가는 교훈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대대손손 가훈으로 간직해 온 것이다.

   공의 묘는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증영리 해좌 언덕에 있는데, 공이 충혜왕 때에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병환으로 중도에서 돌아가셨는 바, 영구가 이곳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아 이 산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그 후 실전한 지 455여년 만인 1796년 정조 20년에 공의 영(靈)이 현감 김건주(金建柱)의 꿈에 나타나 묘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야화(野話)에 의하면 공의 묘소 아래 옹기를 굽는 옹기 가마가 있어 옹기를 구울 때 청솔을 땔감으로 하여 많은 연기가 발생하고 연기가 묘소로 번졌다고 하며, 고을 원님의 꿈에 위엄 있는 분이 나타남으로 원님이 두 분이나 혼절하였으나, 그 다음 담력이 강한 원님이 부임 후 똑 같은 꿈을 꾸었는데 위엄 있는 분이 나타나 연기로 인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도와주기를 요청하여 원님이 옹기 가마를 이전한 후에는 원님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1972년 남북회담 당시 북쪽에서 보내온 판문점에서 평양까지 여정표에 의하면 서흥읍 옆에 ‘이나해(李那海)의 묘’라 기재되어 있어 지금도 보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수방(李守邦) 또는 이나해(李那海)는 양성이씨 석탄공 6세 수방(陽城李氏 石灘公 6世 守邦)으로써 인품이 수려하고 덕망이 높아, 사신으로 갔을 때 영종황제로부터 나해(那海)라는 이름과 직성사인(直省舍人) 벼슬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려 충숙왕으로부터 총애(寵愛)를 받고 있었고, 네 아들 모두가 시중과 상서 벼슬을 하였으므로 당시 세인들이 나해를 닮으라는 뜻에서 사나해(似那海)라고 한 것이 “대장부인 사나이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 KBS 제78회 골든벨 한자 문제 : 似那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