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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흥수(李興秀):생몰년 미상.

  시조 상주국공의 9세손, 진주목사공 빈(贇)의 아들, 당호는 야은(野隱), 해미현감(海美縣監), 세조집권후 여산기포(礪山機浦)에 퇴거, 야은이라 하다. 당질 참의공 휘(徽)가 병자사화로 화를 당하매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다. 은육신에 들다.(1-27)

 

◆ 이백량(李伯良):? ~ 1457

  시조 상주국공의 9세손. 삼사우윤 판군기시사 징(澂)의 아들. 1451년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고 검교판한성부윤에 올랐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문종이 름녹을 특사하여 여생을 마치니 그 마을을 공세동(貢稅洞)이라 하다. 단종복위의 사화로 함양 계도곡(鷄刀谷)에 은거 은육신이 되다. 내자윤(內資尹)으로 원종공신 3등. 함양 경모재(景慕齋)에 배향.(1-51)

 

◆ 이  온(蒕):? ~ 1466

  호는 화산(花山). 시조 상주국공의 10세손. 해주목사 사근(思謹)의 아들. 문장과 덕행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해주 동쪽 화산언덕에 집짓고 조정에서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453년 단종 계유에 수양대군이 군국의 전권을 장악한 이후로는 재덕을 숨기고 은거하여 자위자락하며 여생을 보내니 시인이 화산처사라고 하고 은육신이라 칭하였다. 증 순충보조공신 숭록 의정부 좌찬성 적성군(赤城君)(1-12)

 

◆ 이  진(蓁):1410 ~ 1477

  시조 상주국공의 10세손. 해주목사 사근(思謹)의 아들. 결성현감(結城縣監)을 지내다. 1453년 단종계유 후에 형 찬성공(온)과 함께 화산에 은둔하여 산수금서로 자오하니 은육신이라 칭하다. 당시 해주목사가 여러 차례 천거하였지만 칭병하고 불사하였으며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니 향인들이 헌원옹(軒轅翁)이라 부르다.(1-18)

 

◆ 이유직(李攸直):생몰년 미상.

  시조 상주국공의 10세손. 대경(大卿) 백자(伯孜)의 아들. 마전군수(麻田郡守).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내준 이후 공은 은신불사하고 누징불기하다. 정협(鄭浹) 등 여러 명사들과 동시에 세상을 등지니 시인이 은육신이라 칭하였다. 1456년 세조병자에 삼종인 참의공 휘(徽)와 사육신이 함께 피화하매 공은 때때로 흐느껴 울었다. 1457년 단종이 승하하매 매양 영월쪽을 향하여 우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공이 제공과 더불어 어옹(漁翁) 처사의 행색으로 장릉에 들어가 통곡하니 때마침 하늘에서 곡성이 들려오는지라 망견(望見)한 즉 단종이 사육신과 함께 통곡하면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공이 망배(望拜)하고 또 통곡하였다 하니 이야말로 충절이 감천한 고금에 드문 일이라고 그때 사람들이 칭탄하였다. 1825년 고종12년 경기도내 유생들이 이 충절을 예조에 상계하여 정려사액의 은전을 받았다.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1-57)

 

◆ 이승명(李承明):1446 ~ 1503.

  호 녹촌(鹿村). 시조 상주국공의 11세손. 결성현감 진(蓁)의 아들. 생원. 1480년 전의현감으로 발령났으나 부임하지 않았다.(1-18)
※이상 6위

 

◆ 이  휘(李  徽):? ~ 1456

  조선조 세종·문종·단종·세조때의 문신. 자 미경(美卿), 호 송죽헌(松竹軒). 시조 상주국공의 10세손. 자헌대부 지중추원사 증 의정부 좌찬성 양성부원군 시호 공소공(恭昭公) 사검(思儉)의 아들. 1435년 식년시 진사시 신생원으로 급제. 1442년 사간원 우정언으로 세종임금에게 간관으로서 많은 상언을 하다. 1445년 이조좌랑, 직제학, 1454년 지사(知事). 1455년 추충좌익공신 3등에 오르고 동부승지 역임. 1456년 공조참의로 단종복위를 꾀하다 성삼문·이개 등 사육신과 함께 피화 순절하다.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1-20)

 

◆ 이승소(李承召):1422 ~ 1484

  자 윤보(胤保). 호 삼탄(三灘). 시호 문간공(文簡公). 시조 상주국공의 11세손. 증 의정부 좌찬성 적성군 온(蒕)의 아들. 1438년 진사시, 1447년 문과 및 중시에 3장 장원. 집현전 부수찬, 지제교경연사경 선무랑, 승훈랑. 1450년 집현전 부교리. 1451년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후 집현전 응교. 1453년 집현전 교리로 ‘역대병요’ 수찬 참여. 1454년 사헌부장령, 춘추관기주관, 세자좌필선으로 문종실록 참여. 1455년 직집현전으로 원종공신 2등. 1456년 집현전 직제학, 세자우보덕, 성균관사성. 1457년 예문관 제학으로 명사 선위사가 되고 국조보감 찬술에 참여하다. 1458년 성균관 대사성, 예조참의 1459년 형조·호조·이조참의 및 사은부사. 1460년 예문관제학, 1461년 명황계감을 한글로 옮기고 1465년 충청도관찰사, 1468년 예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춘추관동지사. 1469년 세종실록 찬수관, 1471년 동지관사 순성좌리공신4등 동지경연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양성군, 예조판서가 되다. 1474년 국조오례의 편찬. 1477년 의정부우참찬 경연 춘추관동지사 겸 도총부 도총관. 1478년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1480년 이조판서 겸 주문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 1482년 양성군, 형조판서, 의정부좌참찬, 1484년 숭정대부 지중추부사, 양성군이 되다. 당대의 대문장가로 저서 삼탄집(三灘集)이 있고 충주 청간사(淸簡祠) 부조묘에 배향하다.(1-12)

 

◆ 이  굉(李  宏):? ~ 1593

  의병장. 시조 상주국공의 11세손 춘무(春茂)의 아들. 1593년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진주 촉석루 싸움에서 순절하다.(1-71)